마가를 통해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가를 통해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머 리 말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작성된 신약성서이다. 마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의 토픽을 통해서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복음은 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예수님을 통해서 전하고자 한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천국(헤 바실레이야 톤 우라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마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로 표현한다. 천국이 바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마가나 마태가 전하고자 한 것은 천국 즉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였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는 삼위일체를 통해서 설명되어진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에게만 표현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과 성도간에 어떻게 하나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적인 장치에 불과하다. 성부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도가 하나되는 모습, 그리스도와 성령과 성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떼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는 부활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부활을 육체의 부활이라든가, 육체가 죽어서 이루어지는 부활로 여기는데, 이렇게 되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는 도무지 이해될 수 없게 된다.

마가복음을 통해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메시야 관은 로마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힘있고 권세있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 나라에 권력과 부를 더 생각하고 있었다. 나아가서 유대 지도자들도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이해 부족과 하나님 아들, 메시야 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과 신성모독을 느끼는 것이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고정관념 뿐만 아니라, 영적인 무지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영적인) 어린아이로 표현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관 뿐만 아니라, 천국을 마치 세상의 부를 소유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은 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영적 전쟁의 대상을 사탄과 그를 따르는 귀신 , 어두운 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자기 자신의 육적인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책임을 사탄에게 미루는  그런 행태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내었을 때에도, 그들이 귀신을 쫒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귀신은 영적으로 성도의 적이 아니라, 천사의 한 부류에 불과한 것이다. 역할을 달리할 뿐ㅁ이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교회 신도들은 보다 마가복음의 체계적인 분석을 통해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4. 4.

 

진리의 선교회

 

 

목 차

 

1.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 인증받으심/1  

. 세례요한, 예수, 사탄

1. 그의 오실 길을 곧게하라 / 1

2. 삼위일체와 세례  / 6

3. 예수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다 / 12

.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

1.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다/ 20

2. 어부를 부르시다 / 25

3. 열두 제자를 세우심/ 32

 

2. 본격적인 전도여행/37 

.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고쳐주심

1.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 37

2. 열병을 치료하심/ 41

3. 중풍병자를 치료하심/ 45

4.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심/ 48

5. 열두해 혈루증의 여인이 나음을 받다/ 52

6. 스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55

7.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다/ 59

8. 뱃세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65

9. 맹인 바디메오가 고침을 받다/ 73

. 바리새인들과 논쟁

1. 금식 논쟁 / 78

2. 안식일 논쟁/ 83

3. 장로들의 전통 / 87

4.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90

5. 서기관들을 삼가라/ 96

 

. 영적 전쟁의 핵심

1. 영적 전쟁의 대상/ 100

2.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109

3. 고향에서 배척당함/ 113

4.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 118

5. 나와 복음을 위하여/ 122

 

3.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126

.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

1. 씨뿌리는 비유/ 126

2. 등경위의 등불/ 131

3. 자라나는 씨 비유/ 134

4. 겨자씨 비유/ 137

5.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140

.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믿음

1. 베드로의 고백/ 144

2. 변화산 사건/ 148

3. 귀신들린 아이를 치료못하는 제자들/ 154

4. 영적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156

5. 누가크냐/161

6. 나귀타시는 예수님/171

7. 유다의 배반/176

8. 십자가에서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이 다 도망하다/18

9. 청년이 벗은 몸으로 도망하다/186

.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아들이신가

1. 바람을 잔잔하게 하심/ 190

2.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대섯개/ 193

3. 사천명을 먹이심/ 199

4. 죽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킴/ 202

5. 영과 혼과 육에 대한 이야기/ 205

4.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자/ 210

. 성전 이야기

1. 성전의 타락/210

2. 무화과 나무의 비유/ 217

3. 포도원 농부의 비유/ 221

. 결혼 비유

1. 모세의 이혼증서/230

2. 남녀가 하나되는 것의 의미/234

. 십일조의 이야기

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240

2. 십일조는 반드시 내야하는가 / 244

 

5. 죽음, 부활, 재림/        248

. 십자가의 죽음

1. 성경을 이루려 하심/ 248

2.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심/ 254

3. 가난한 과부의 헌금/ 257

4. 성전의 무너짐/ 261

5.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271

6. 신성모독죄/283

7. 십자가의 죽음/ 288

.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기 전의 삼일/298

. 부활 및 재림

1. 부활논쟁/ 304

2. 유월절을 지키다 / 309

3. 재림/ 314

. 가장 큰 계명

1.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 / 320

2. 부자와 낙타 이야기/ 328


1.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 인증받으심

 

. 세례요한, 예수, 사탄

 

1. 그의 오실 길을 곧게하라

마가복음 11-8절『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사야의 글에 나타난다.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내 사자는 세례요한을 의미한다. 이 세례요한은 말라기(45)에서 보듯이 엘리야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요엘 231-32절에서 더 상세하게 언급된다.『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 선지자가 크고 두려운 날에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 요엘 228-30절에서 언급한다.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요엘이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216) 사도행전 25절에서 『그 때(오순절)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오순절에 이방 땅에 살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제자들이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놀라고 신기해서 서로 말을 할 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요엘의 말을 인용해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가 한 말에 추가로 220절에서 언급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 말은 마태복음 24 29절의 내용과 비슷하다.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이 말에 대해서, 교회 사람들은 종말 때 예수님의 공중 재림사건때 일어날 대환란으로 말한다. 추가로 마태복음 2430절에서『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을 하므로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공중에 재림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라나 이 말은 종말 때, 예수님의 지상 재림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진 성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들어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께서 내 영(성령)을 내 종들에게 부어준다는 말씀을 하셨다.

장차 성령을 부어주실 여호와의 종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부할한 것을 믿는 성도들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이전 옛사람(옛성전)이 무너지고,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는데, 옛성전이 무너짐을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실제, A.D.70년에 예루살렘 성전(옛성전)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본다고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은 성도의 심령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에게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그의 오실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길이다. 엘리야의 영으로 세상에 태어난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여러가지 각도로 구불구불 말을 전했는데, 이제 세례요한이 직선적으로 말을 전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다는 말이다. 엘리야와 천국(심령 속의 천국:부활)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바로 부활신앙인 것이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 이 말은 영생의 몸으로 승천한 것으로, 예수님이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한 것과 같은 모습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세례요한이 전하는 천국은 바로 부활이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부활의 전제조건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다. 이것을 세례로 연결하여 성경은 말한다. 로마서 6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세례요한은 물세례만 말을 했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도 세례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는다. 마태복음 313-15절에서『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것은 죄의 몸으로 세상의 모든 죄인을 대속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죄의 몸은 첫사람 아담(옛사람)으로, 마지막 사람 아담(예수)이 대속(십자가의 죽음)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3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불세례는 옛사람(육적 혼)의 죽음을 표현한 것이다. 혼은 옷과 같은 것이다. 성령의 불로 태우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을 상징한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나타난 심판(둘째 사망)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불로 태워진 자는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은 자로 하나님께서 여기신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이고, 불세례는 혼(옛사람)에 대한 죽음이다. 이 둘을 합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된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도 죽고, 혼에 대해서도 죽은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새사람(새혼:영의 몸)으로 부활하는데, 예수와 함께 십자가와 연합된 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켜주신다. 즉 새사람의 몸을 입혀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부활:그리스도의 옷)의 몸을 입는 것이다. 로마서 6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이 말씀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다. 낙타는 율법을 상징한다. 바로의 노예 이스라엘은 율법 아래 있는 자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 하기 전에 마지막 열번째 재앙인 장자의 죽음(어린양의 죽음)이 나타난다. 그래서 백성들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어린양의 고기를 급하게 먹었다.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출애굽을 대비한 것이다.

메뚜기는 심판을 상징한다. 장자의 죽음은 애굽 사람이던 이스라엘 사람이든 모두가 죽은 자임을 상징한다. 그런데,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것(불세례)은 이스라엘 백성이 옛사람인 장자(첫사람 아담)와 함께 죽고,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홍해가 갈라져 그 속에 들어간 자는 다 물에 빠져 죽었다.(물세례) 애굽 사람이던 이스라엘 사람이던 다 죽은 것이다. 이 죽음은 죄에 대해서 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그러나 홍해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도 죄에 대해서 죽었지만(십자가의 죽음), 하나님의 은혜로 의에 대해서 산 자(부활)가 된다.

석청은 가나안을 상징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듯이,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새사람들과 이이들이 여호수아(예수)와 갈렙(이방인)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나안은 부활을 상징한다.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현재적 부활이야말로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현재적 부활을 받아드리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육적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2. 삼위일체와 세례 

삼위일체의 교리를 보면 삼위일체론의 초기 기원은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확장에서 시작되었다. 막 태동되었던 기독교에게 70 유대 전쟁에서 다른 유파가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바리새파 유대교와 인성을 강조하는 에피세파, 신성의 영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 등장으로 기독교 뿌리를 흔든 자극이 되었고, 육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논리적인 설명인 신학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즈음에 형성된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론과 그 그리스도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인 삼위일체가 등장하였다. 삼위일체는 점차 발전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는 세계관과 신학적 지침으로서 기독교에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위키백과의 내용을 빌려서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로 존재하지만, 본질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교리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후대 교회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위일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삼신론은 세 인격의 세 하나님이라는 이론이다. 양태론(modalism)은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성부·성자·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 인격의 한 하나님이라는 이론이다.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의 시대에는 성자로, 신약 이후에는 성령으로 활동한다는 주장이 양태론이다. 종속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온전히 하나인 주체이나,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양자론은 하나님이 예수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삼위일체 찬성 교파와 교단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구약성경, 신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보편교회 시대의 신학적 기준을 사도적 지침이라 여기고 수용하는 교단들이다.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 개신교회 교단들인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다.

삼위일체 반대 교단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교파로, 현재 주류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배교라 여기고, 초대교회에서 보편교회 시기를 지나며 현재 교회가 배교로 단절되었으며, 삼위일체 역시 단절의 이론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단절을 잇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교리를 거부하는 회복주의 성향들로 여호와의 증인,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 유니테리언 등이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하나님은 세분이 아니라 한분이시나, 하나님 나라의 범죄한 천사들을 세상에 가두고(인간을 포함한 천지창조), 그들을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구원)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성경 귀절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1 9-11절『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부 하나님이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땅에 초림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는 모든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오신 분(메시야: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하는 모든 사역을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하나님 자리를 떠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 누가복음 4 6-7절에서『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것이 되리라』라고 말했다. 사탄은 아들 예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하고, 성부 하나님 자리에 앉게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호와이시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오셨을 때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다. 누가복음 4 8절에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대답하시기를『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대부분 신도들이 예수를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신격화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인자)인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하여, 예수를 믿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동일시 한다.『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라고 말을 할 때, 그들의 눈에는 예수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아들 예수의 피를 요구하게 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교회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말을 하면서도 성자 하나님이라는 말을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4 13절『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엔 아우토)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을 주시는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세분의 하나님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엔 아우토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역시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 안에 있게 된다.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성령과 성도의 삼위일체를 표현하고 있다. 

요한일서 4 14-15절『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도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는 요한을 포함한 제자들의 무리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던 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되며, 성부 하나님이 성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도간의  삼위일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위일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나타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성령, 성도간의 관계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성도간에도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사상은 하나님과 성도가 하나됨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인 것이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범죄한 천사로 인하여 분리되었으므로, 다시 하나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마치 세분의 하나님이 위격으로 있는데, 하나라는 모호한 설명으로 삼위일체의 의미를 하나님에게만 집중한다면 본래의 그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다. 

 

3. 예수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다

마가복음 1 12-13절에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마가복음에서는 간단하게 나와 있으나, 마태복음에는 보다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마태복음 4 1-1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탄과 예수는 세상적으로 말을 하면, 검사와 변호사 역할이다. 하나님은 대통령으로 비유할 수 있다. 법에 따라, 대통령이 죄인들을 기소하는 역할을 검사제도를 만들어서 권능을 주었다. 온 세상은 죄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감옥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대통령이 감옥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사면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사면의 권능을 변호사 역할을 하게 될 그의 아들에게 맡겼다. 그런데, 검사는 당연히 자신의 역할에 도전하는 이 변호사가 탐탉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정말 권능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게도 하고 해서, 앞으로 수없이 많이 만날 것인데, 변호사가 검사에게 자신의 직책을 소개하고, 검사는 변호사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검사와 변호사가 대면하게 해 주는 역할을 대통령 비서실장이 맡았다. 변호사는 죄인들을 사면하기 위한 대책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성령은 대통령 비서실장을 상징한다.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여 주리다 라는 말은 변호사가 회개하는 죄인들을 발굴해야 하는데, 많은 준비를 했다는 말이다. 변호사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배가 고픈 것이다. 검사는 변호사에게 세가지의 질문을 하면서, 서로의 팽팽한 기 싸움은 진행되었다.

첫번째 질문은 당신이 죄를 사면할 권능을 가졌다고 하는데, 여기 죄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어디 이 자리에서 사면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는 아무 죄인이나 사면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사면한다는 말로 대답했다. 회개하는 마음은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깨닫고, 그 분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나, 검사는 변호사의 말에 응수하지 못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이 돌들은 율법 아래 있는 죄인들을 의미한다. 떡덩이는 생명이 있는 떡으로서 죄를 벗고 의인이 된 자를 의미한다. 즉 죄인을 사면해서 의인으로 되도록 해 보라는 것이다. 이게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변호사인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 자가 의인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하늘의 생명)을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말씀은 구약성경일 것이다. 모든 죄인은 동물을 죽여서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 희생제사를 통해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말이다. 말씀 속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이다. 당신이 죄인들을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만일 당신이 죄를 범하면 당신 스스로 사면을 하게 할 것인가 묘한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은 변호사도 세상의 법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은근히 유도한 질문이다. 대통령은 변호사를 세상이라는 감옥에 파견할 때, 세상법에 적용받지 않도록 정해놓았다. 그런데, 변호사가 만일 검사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면, 법 집행이 가능해지며, 언제라도 검사가 변호사라도 법의 규정을 어기면, 기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는 검사의 유도 질문에 대해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서 시험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을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검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자살행위이다.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다. 예수가 율법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예수도 철저히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유도 질문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말하고 있다. 사탄의 질문에 넘어간 자들이다.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 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서 수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종의 형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수동적 순종의 일부라는 것이다. 능동적 순종의 의미 속에 내포하고 있는 사상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과 예수님의 율법적 순종이 합해져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말 이단적인 발언들이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신 분이었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율법에 따라 죽으셨다.

세번째 질문이다. 대통령께서 죄인들을 기소할 수 있도록 모든 권한을 나에게 주었는데, 당신이 대통령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권한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당신이 대통령이나 다를 바가 없으므로,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차라리 기소권을 당신에게 다 넘겨줄 테니 당신이 북치고 장구치고 하세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내가 비록 사면권을 부여받았지만, 대통령은 절차를 중요시하므로, 당신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풀어주어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큰 결단을 내린 것이니, 대통령이 지시한 대로 당신이 맡은 바를 열심히 잘 하시요 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검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그 자리를 떠고 말았다. 변호사도 대통령실 행정관의 안내를 받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 이야기이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이 성경 귀절은 마태복음 4 8-10절의 말씀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4 5-8절을 보면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탄이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라고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죄인을 기소하는 기소권을 넘겨준 것을 의미한다.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에서 “절하다”라는 헬라어는 프로스쿠네세스(προσκυνήσς 기본형은 프로스쿠네오) 라는 단어이다. 아첨하다, 부복하다, 예를 표하다, 예배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는 절하다 라는 의미보다, 미안하다는 의미로 예를 표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히 섬기는가에 대한 시험이다. 이는 영적 간음에 해당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영적 전쟁을 말하면서 거의 대부분 사탄과의 전쟁이라고 말들을 한다. 죄인은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당연히 검사와 다투게 된다. 죄인이 검사를 바라볼 때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벗어나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사탄(검사)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의 적은 다름 아닌 육적 자아인 것이다. 영적 자아가 육적 자아와 싸워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우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에 해당된다. 만일 육적 자아도 좋고 영적 자아도 좋다고 생각하면, 하나님도 좋고 우상도 좋은 영적 간음을 하는 모양이다. 비진리에 속지 말고 진리에 서야만 살 수 있다.

 

.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

 

1.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다

마가복음 1 14-15절『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찾다는 것은 선지자는 세례요한의 때까지였으므로, 율법의 시대는 가고 복음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복음의 내용은『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이다. 이와 비슷한 문장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데, 32-3절에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14-15절의 말씀의 주어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백성들에게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나님께로 돌이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예수라는 분이 왔으니 그 분의 말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믿으라(열매를 맺으라)는 의미가 된다. 세례요한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나무가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끔찍한 말을 했다. 열매를 맺으려면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미 세례요한으로 부터 물세례(죄사함)를 받았으므로 다음에는 불세례(옛사람의 죽음:십자가의 죽음)와 성령세례(새사람으로 태어남:부활)를 받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으로 부터 물세례를 받자말자, 바로 성령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불세례(십자가의 죽음)에 앞서서 미리 성령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마가복음 19-11절에서『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이는 장차 십자가에서 죽고(사랑하는) 부활하는(기뻐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은 아가페의 사랑으로서 온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기뻐하는 자는 죽음은 슬프지만, 부활은 기쁨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표인 것이다.

마태복음 32-3절에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주어는 한글 개역개정으로 볼 때, 천국이 되지만,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천국이 주어가 아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이 부분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γγικεν(엥기켄:가까이 왔다) γρ(가르:~을 위하여) βασιλεα τν ορανν(헤 바실레이야 콘 우라논:천국). οτος(이 분은) γρ(`을 위한) στιν(이다) ὁ() ηθες(말씀해 왔던) διὰ(통하여) σαου(에사이우)

이것을 다시 우리 말로 번역하면,『천국을 위하여 가까이 온, 이 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한 자이다.』따라서 주어는 이 분(οτος)이다.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가복음 115절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마태복음 32절은 천국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목적은 바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심령 속의 하나님나라, 천국, 다른 말로 영적 에덴동산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에덴동산으로부터 쫒겨났다. 즉 이 말은 심령 속의 성전(옛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져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옛성전(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새성전(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게 열매맺는 일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회개는 옛성전에서 자기가 왕노릇한 것에서 돌이키라는 말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의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하와(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그 탐욕으로 인해서 물질세계가 만들어지고, 사람이 창조되었는데, 그 마음 속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우상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 탐욕을 가진 자가 옛성전에서 왕노릇하는 것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 새사람(부활)이 되어서 새성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세상으로 쫒겨났다. 창세기 21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하나님이 세상이라는 물질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도 만들고, 에덴동산(동산의 에덴)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에덴동산으로부터 나가게 한 것이다. 그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에도 그 에덴동산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상징적인 말씀이다. 에덴동산을 성전으로 비유한다.

동산에서 산은 하나님의 성전(성소)을 의미한다. 성전(성소)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5 40절에서『너는 삼가 이 상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지을지니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하늘의 식양대로 짓게 했다. 하늘의 식양은 무엇인가? 하늘의 식양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히브리서 9 24절에서『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동방의 에덴에 있는 동산과 하늘의 식양대로 만든 성전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두었다고 말했다. 사람은 아담이다. 아담은 세상에서 태어난 첫사람이다. 첫사람 아담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로마서 5 14절에서『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모형이라는 말은 형태와 속성이 같은 의미를 갖는다. 죄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인으로 이 세상에 오고, 마지막 아담은 죄인과 같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이와 같이 죄의 몸으로 태어나서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알려주신다. 그리고 회개하여 돌이켜 영의 몸으로 부활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세상 사람들에게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은 죄의 몸에 대해서 죽고, 영의 몸(의의 몸)으로 살게 하기 위해 태어나신 그리스도인 것이다.

심령 속의 성전(에덴동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사의 불칼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맞아야 한다. 이게 불세례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로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제사장의 옷)을 입고 성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에덴동산을 회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옛성전(옛사람)을 허무시고(십자가에서 죽고), 새성전(새사람)을 주시므로(부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예수와 함께 연합되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부활한 것을 믿으면 새성전이 세워지고,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 이게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열매맺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가 천국 혼인잔치를 하는 것이다.

 

2. 어부를 부르시다

마가복음 1 16-20절『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어부를 처음으로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에는,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다섯이 있었는데, 바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빌립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기술이 있다. 그들은 경험적으로 물고기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잘 안다는 말이다. 물고기들 중에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은신처를 찾거나 한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바위 근처나 바닥의 모래에 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물 한 가운데, 유영하는 물고기들은 그런 전략도 없으며, 먹이 때를 찾으려 여기 저기로 방황하면서 가끔은 떼를 지어 이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고기들은 어부들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물고기들의 생존 전략 중에서 가장 하등한 무리가 되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으로 말을 하면, 힘없고 능력없는 갈릴리 사람들과 비유될 수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성분별로 나누어 보면 어부 출신이 다섯명이고 농부 출신이 두명, 그리고 도마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셀롯이라는 시몬은 열심당 출신이고 그와 친했던 야고보의 아들 유다 즉 다대오와 가룟 유다 역시 열심당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리 출신의 마태나 작은 야고보는 제자들 명단에서 항상 하위에 기록되는 소외된 계층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이다. 갈릴리는 본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땅이었다.

이사야 91절에서“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B.C. 169년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 피를 뿌리며 하례를 금지하고 모진 박해를 가할 때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갈릴리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 지역은 저항세력인 열심당의 아지트가 되었다. 로마의 군대와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 헤롯 안디바 그리고 예루살렘의 사두개파는 늘 갈릴리 사람들을 감시했고 바리새파는 저항세력을 자신들의 세력 기반으로 이용하려 했다.

예수께서는 왜 갈릴리 사람들을 그의 제자로 택한 이유는 그들이 위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과 같은 그런 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팔복에 대해서 설교하신 내용 중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 라는 말씀이 있다. 심령(프뉴마)이 가난한 자는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이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영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나 이 세상에 갇혀사는 자를 의미하며, 그것을 깨닫는 자가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복이 된다.

요한계시록 317절에서『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자신은 거지인데,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제자였음에도 그는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된 것이다. 이게 가난한 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세번 부인한 것을 두고 애통해 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예수를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찾아오신다. 그리고 세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다. 베드로는 주님이 아신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나타난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자기가 생각하고 만든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을 부려 먹는 것이다. 기복신앙이 대표적이다.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요청하다가 안되면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는 자가 애통하는 자가 된다.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자라고 생각했는데, 가난한 자인 것이다. 영적 파산 상태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애통하지 않는 다. 영적 가난 상태를 깨닫는 자가 애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자에게 찾아오시고, 천국을 세워주신다.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탕자의 비유처럼, 죽은 것같이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옛사람의 죽음이다. 옛사람이 죽어야, 하나님이 새사람으로 만들어주신다. 옛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이 죄의 몸 속으로 들어온 것을 깨닫고 애통하는 것이다. 왜 자신이 죄인이 되었는가를 깊히 묵상하지 않으면 애통하는 마음, 돌이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돌이키는 의미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세리, 창녀, 귀신들린 자와 식사도 하고 친구처럼 그들을 대해 주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529-30절에서『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다녔다. 그들은 천국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천국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려 올라오듯이, 구원은 신도가 낚시 바늘에 걸리듯 하나님 말씀(십자가와 부활)에 낚아채이는 것이다. 낚아채이면, 천국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그들에게 침노당하는 것이다. 천국은 부활을 믿는 자로 부터 침노를 당한다

마태복음 11 12절『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βασιλεα τν ορανν βιζεται),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βιαστα ρπζουσιν ατν.)

여기에는 두 문장으로 되어있다. 즉 앞의 것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가 침노당한다는 말이다. ( βασιλεα τν ορανν βιζεται)에서 비아제타이(βιζεται)는 강제로 끌려가는 것으로, 물고기가 강제로 낚시에 끌려가는 모습이다. 즉 성도가 강제로 하나님 말씀에 낚여 천국으로 끌려간다는 말이다.

천국이라는 말은 헬라어로『헤 바실레이아 톤 오우라논』으로 읽힌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보좌의 하나님이 계시는 영적인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님이 마태복음 6 10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늘은 보좌의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이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심령 속의 천국(헤 바실레이야 톤 우라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에서 지금이라는 말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세례요한의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라는 말로서, 천국은 침노당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어, 천국이 부활한 영의 몸에 의해 침노당하는 것이다. 침노당하는 것을 들림받는 것이다. 이는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에게 적용된다. 먼 장래 종말시에 육체가 변하여 휴거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현재적 부활을 믿는 성도에게 현재적 들림(영적 휴거)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심령 속의 천국을 이룬다.

두번째 문장은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βιαστα ρπζουσιν ατν.)』비아스타이(βιαστα)는 폭력자, 난폭한 자를 의미한다. 아르파조신(ρπζουσιν)은 강제로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사도행전 2310절에서 사용되었다.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자(현재적으로 부활한 자)에게 천국은 침노당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강제로 폭력적으로 빼앗으려는 자가 있는 것이다.

누가 빼앗는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짜 복음을 내세워, 신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들을 한다. 가짜 복음이란 율법주의, 인본주의, 영지주의를 의미한다. 대부분 교회 안에 이런 가짜 복음이 너무나 만연한 것이다.

마태복음 2313-15절에서『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교회에서는 마태복음 11 12절의 말씀을 성도는 구원을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구원은 각자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몸부림 친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침노할 수 있는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침노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에다가 무엇인가를 더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14절의 (없음) 부분은 헬라어 성경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넷슬 알란드 성경에는 없음으로 되어 있지만, 스테파누스 성경은 포함되어 있다. 14절을 스테파누스 성경에 따라 번역해 보면,

 ουαι δε υμιν γραμματεις και φαρισαιοι υποκριται οτι κατεσθιετε τας οικιας των χηρων και προφασει μακρα προσευχομενοι δια τουτο ληψεσθε περισσοτερον κριμα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고 겉치레로 길게 기도하나니 그런즉 너희가 더 큰 정죄를 받으리라.

이 말은 유대지도자들이 성전의 주인처럼 힘없는 백성들을 갈취하면서 겉으로는 외식하는 자의 모습을 하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가짜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것이다. 이들이 폭력자라는 말이다. 예수님도 폭력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셨다. 천국(예수님의 몸)을 이 땅에서 빼앗겼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므로,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천국을 회복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역시 천국(하나님 나라)이 되는 것이다. 성도 안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천국(하나님 나라)을 회복하는 것이다. 보좌의 하나님 나라와 구별되는 천국을 셋째 하늘이라는 용어로 바울은 사용한 바가 있다. 물론 셋째 하늘인 천국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된다.

 

3. 열두 제자를 세우심

마가복음 3 13-19『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열둘이라는 의미는 히브리어 글자에서 찾을 수 있다. (요오드: י)과 둘(베드: בּּ)이다. 요오드는 손이라는 의미이고, 베드는 하나님의 집(성전)을 의미한다.『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에포이에센 ποησεν)』산은 영적인 의미로 하늘 성전을 의미한다. 자기가 원하시는 자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는 자이다. 세우셨다는 에포이에센은 창세기 11절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에 등장한다.

ְּ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ν ρχ ποησεν θεὸς τν ορανν κα τν γν

히브리어 바라( בָּרָ֣א )는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칠십인역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ποησεν(에포이에센)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자신의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신 것을 나타내주신다. 무엇인가가 바로 제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정하셨는바, 때가 되어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나셨다. 이유는 세상에서 감추어진 에덴동산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세상에서 감추어진 에덴동산은 다름아닌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로 인해 물질세계와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그들의 영을 속에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세상에 갇힌 존재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면 열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일을 담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영적으로는 재창조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면면을 보면, 부류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류는 (3)명으로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다. 예수님이 이들을 자주 특별한 장소로 데리고 다니셨다. 두번째 부류는 (8)명으로서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1)명은 가롯 유다이다.

(3)은 언약의 성취를 의미한다. 언약의 성취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심령 속의 새성전을 세우는 일이다. 야고보는 구약성경의 야곱을 상징하며, 그는 하나님과 싸우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지만, 한쪽 다리의 힘줄이 끊어지므로 절게 된 자이다. 그래서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오순절 이후에 가장 먼저 순교하는 자가 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부활)를 그림으로 묘사했다. 요한은 부활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야고보(십자가의 죽음)와 요한(부활)은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우레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 반석은 교회를 의미하며, 심령 속의 성전이 이루어진 성도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 세명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두번째의 부류인 팔(8)명은 창세기 21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와이쿨루(이루니라) 하사마임(하늘) 워하아렛츠(땅과) 워칼() 차밤()]

(וַיְכֻלּ֛וּ הַשָּׁמַ֥יִם וְהָאָ֖רֶץ וְכָל־צְבָאָֽם) 개역개정의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과 차이가 있다. 차밤(기본형은 차바)은 군대라는 것이다. 『하늘과 땅, 모든 군대가 다 이루어지니라』 라고 번역했어야 했다. 

하늘의 군대는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 땅의 군대들은 이 땅에서 범죄한 천사들(인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창조 7일 째 배치가 완료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 (8)은 재창조를 의미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 되던 날 할례를 하도록 했다. 하늘의 군대는 세명(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상징하고, 땅의 군대는 가롯 유다를 상징한다.

유다라는 이름은 히브리인이라는 의미다. 히브리는 이브리에서 근원을 찾는다. 이브리는 강을 건넌 자라는 의미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간 자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을 이 땅으로 이주하여 보내어진 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의 군대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였다.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재편성이 된 후에 예수님의 제자(팔명)들을 통해서 새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는다. 물론 열두 제자 모두 이런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것이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3:14) 세가지 사명이 있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의 심령 속으로 재림하여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함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 제자들을 돕는 것이다.

두번째는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어졌다. 표면적으로는귀신을 쫒아내는 기적을 보여주므로서, 전도의 역량도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귀신을 쫒아낸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죄인을 율법의 그물에서 풀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전도의 주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죄를 사해주는 권능을 주셨다. 죄를 용서받아야만 율법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율법의 그물에서 벗어나므로 귀신(악역 담당 천사)이 관리하던 죄인이 풀려나가는 것이다.

 

 

 

 

2. 본격적인 전도여행

 

.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고쳐주심

 

1.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심

마가복음 1 23-27절『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마가복음 121-22절『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공적으로 모여서 종교적 의례를 행하지는 않았다. 이날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이었지 어떤 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날은 아니었다. 물론 가정에서 사적으로 지키는 의례는 있었지만, 공적으로 모여서 드리는 예식은 따로 없었다.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번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갔다. 유대인들의 명절인 초막절, 칠칠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성전으로 와야 했다.

그러나 성전 중심의 종교는 유다의 멸망으로 끝을 맺는다.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는 점령당하고, 예루살렘은 파괴된다. 성전은 무너졌고, 성전 기물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그동안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고, 이스라엘의 상징이며 구심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 상징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그들이 찾은 것이 말씀이었다. 포로기에 그들은 오히려 말씀에 집착했다. 거룩한 문서들을 정리했고 책으로 엮었다. 제사가 중심이던 성전 전통에서는 소홀했던 일이다. 성전 대신 그들은 회당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유대인 남성 10명 이상이 모이면 회당을 세우도록 했다. 중요한 것은, 회당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 공동체가 그 구성 요건이었다는 점이다. , 단지 유대인 남성 10명만 모이면 회당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10명만 있으면 되는데, 어느 규모 이상의 건물도 필요 없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회당은 곳곳에 세워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제사가 아니라 말씀 중심의 예전을 가지게 되었다.

성인 남성 중 누구든지 성경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회중 앞에서 읽고 해석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복잡한 제약이 없었다. 그 제도를 가장 잘 이용한 경우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사역이다. 그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회당을 찾았고, 말씀을 꺼내 읽고는 새로운 복음에 맞추어 그것을 해석했다. 그러한 회당 전통은 이미 포로기부터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이었다.

회당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안식일에 그들이 행할 종교 의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 가까운 곳에, 성인 남성 10명 이상이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제사가 아닌 말씀 중심의 의례가 생긴 것이다. 접근성 덕분에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종교 기관인 회당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제사가 사라지니 제사장이나 왕족이라는 특권 계층이 지배할 수 없었다. 그들 대신에 누구나 예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로써 안식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 되었다. 말씀을 읽고 해석하며 그 의미를 새기는 날이 되었다. 

회당에 귀신들린 자(토 프뉴마 토 아카사르톤)에서, 토 프뉴마(τὸ πνεῦμα)는 영(성령)이다. 영은 천사를 의미한다. 토 아카사르톤(τὸ ἀκάθαρτον)은 불순한 이라는 의미로서 죄인을 의미한다. 즉 죄인을 관리하는 천사라는 말이다. 이 죄인은 예수와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자를 의미한다.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귀신들린 자의 의미는 귀신(천사)과 귀신이 관리하는 죄인을 의미한다. 귀신도 천사이다. 죄인을 관리하는 악역을 맡은 천사일 뿐이다. 그 천사가 하는 말이『예수님 이 자는 내가 관리하는 죄인인데, 당신과는 상관없지 않습니까』라는 말이다. 모든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천사가 있다. 죄인에게는 흙에 가두어서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자유인이 되면 그에게 천사는 복음을 전하는 천사가 된다.

귀신이 예수께 말하는 것이다.『우리를 멸하러(아포레사이)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아포는 ~으로부터 떨어지다 라는 의미다. 레사이는 올레스로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파괴되다 라는 의미다. 그래서 아포레사이는『이 죄인은 우리와 떨어져,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끝나는 것인가요』라고 묻는다. 그리고 귀신은 예수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토 프뉴마 토 아카사르톤)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이는 그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가므로 죄인이 자유인이 되는 순간이다. 비록 귀신이 나가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다시 죄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권위(엑수시안) 있는 새(카이네καιν) 교훈(디다케 διδαχὴ)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디다케는 법률적인 용어로서 사법적인 권한을 의미한다. 새 교훈이라는 카이네 디다케는 고린도후서 36절에서 사용되었다.『그가 또한 우리를 새(카이네) 언약(디다케)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프뉴마)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여기에서는 디다케가 언약으로 번역되었는데, 새언약은 영(프뉴마)으로 함이며,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즉 갇혀있는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의 특별 사면권으로 인하여 풀려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2219-20절에서『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래서 새 교훈은 새언약으로서 예수의 피를 마시고(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자가 죄로 부터 자유함을 입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들(토 프뉴마 토 아카사르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예수님이 죄인을 관리하는 천사(토 프뉴마)에게 명하니, 그 천사(귀신)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천사가 예수님께 순종하는 이유는 사탄(마귀)이 예수를 시험하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난 뒤에, 죄를 관리하는 천사가 예수님께 수종들었다. 그래서 그 악역을 맡은 천사(귀신)들은 모두 하나님 아들에게 순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13절에서『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데리온)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데리온은 짐승으로, 인간의 탈을 쓴 자(짐승)의 모습인 죄인을 의미한다. 예수님(변호사)이 죄인을 석방시키기 위해 사탄(검사)과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변호사)의 승리로 죄인은 석방되는 모습이다.

 

2. 열병을 치료하심

마가복음 1 29-31『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시몬과 안드레는 형제였다. 시몬은 결혼한 상태로 그의 장모가 함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영적인 사람이 되었지만, 시몬의 장모는 여전히 육적인 사람으로 표현된다. 열볍으로 누워있다는 말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자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녀를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퓌레소)으로 누워있다(카테케이토)고 표현하는데, 누가복음 438절에서는 중한 열병(퓌레토스)을 앓고 있다(쉬네코메네) 고 표현했다. 마태복음 814절에서는 앓아눕다(베블레메넨) 라는 표현이다.

열병인 퓌레소는 사도행전 282절에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퓌란)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퓌란은 퓌르(πυρ)에서 유래된 것으로 불이다. 사도행전 23절에서『마치 불(퓌르πυρ)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여기에서 불은 성령의 불세례를 의미한다. 불의 혀는 번개가 연상되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을 연상하게 한다.

앓아눕다(베블레메넨:기본형은 발로)는 단어는 마태복음 310절에서 사용되었는데,『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발로)에 던져지리라』앓아누운(발로) 것이 불(발로)심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열병에 걸려 앓아누어 있는 모습은 영적으로 불심판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세례요한은 성령과 불세례라고 했는데, 누가복음 12 49절에서 사용되었다.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예수님이 삼년 동안 하신 것은 불을 땅에 던지러 온 것이다. 12 50절에서『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 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고 말했다. 불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심판)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과 같이 그렇게 심판받을 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최초의 불심판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창세기1924-25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

וַֽיהוָ֗ה הִמְטִ֧יר עַל־סְדֹ֛ם וְעַל־עֲמֹרָ֖ה גָּפְרִ֣ית וָאֵ֑שׁ מֵאֵ֥ת יְהוָ֖ה מִן־הַשָּׁמָֽיִם׃

וַֽיַּהֲפֹךְ֙ אֶת־הֶעָרִ֣ים הָאֵ֔ל וְאֵ֖ת כָּל־הַכִּכָּ֑ר וְאֵת֙ כָּל־יֹשְׁבֵ֣י הֶעָרִ֔ים וְצֶ֖מַח הָאֲדָמָֽה׃

어둠이 지나서 날이 밝은 것이다. 날이 밝은 것은 흑암이 가버리는 모습이다. 유황과 불에서 유황은 백향목 나무의 진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노아의 방주에서 사용된 진이 바로 백향목 나무의 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불은 성령의 불(에쉬)로서, 소돔과 고모라를 삼켜버린 심판인 것이다. 

신명기 4 24절에서『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하나님의 공의 심판은 한 사람의 의인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들이 구원을 얻는 그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죄인도 다 옛사람이 불에 타 죽고, 새사람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성령세례)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20 13-15절에서『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불못에서, 불은 성령의 불이요, 못은 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는 자들은 불못에 빠지는 것이다. 즉 불에 옛사람()이 타 죽고(불세례), 죄의 몸(육적 몸)이 물에 빠져 죽는(물세례)것이다. 이는 요한복음 35절에서 말하는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불세례를 통해서,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빠진다. 둘째 사망에서 모든 것이 죽고, 성령세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손을 잡아 일으키니(에게이렌) 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다시 태어나는 부활을 상징한다. 마태복음 1621절『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에게르데나이:γερθναι)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에게르데나이 (ἐγερθναι)는 영어로는 be raised to life(niv),  be raised again(kjv)로 표현되고 있으며, 개역개정에는 ~살아나야 할 것으로 번역되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일어나다 라는 의미다. 시몬(베드로)의 장모를 통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다.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디에코네이 διηκόνει)디에코네이는 수행원이 되다, 집사의 일을 행하다 라는 의미다. 시몬의 장모는 육적으로 죽고, 영으로 예수님의 사역에 수행원이 되는 것이다.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심지어 사탄도 예수님을 시험하였지만, 시험이 끝난(통과된) 후에, 사탄도 천사의 역할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수종들게 된다. 마가복음 113절에서『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디에코눈 διηκόνουν)

 

3. 중풍병자를 치료하심

마가복음 23-12절에서 예수님이 중풍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환자에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29-12절에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누가복음 5 21절에서는『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병을 고치러 왔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죄를 사할  있는 분은 하나님  분이신데,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죄를 사할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교회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므로 병의 고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우리도 간절히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확대해석 한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보셨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보신 중풍병자의 믿음과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과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야이셨다. 그들은 오랜기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기대는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깨닫고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메시야를 기다리기는 하지만, 메시야에 대한 간절한 믿음은 없었던 것이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없어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없는 그런 상태였다. 중풍환자의 영적인 의미도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를 의미한다.중풍병자는 단지 몸을 움직일  없는 몸을 치유받기 위해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중풍병을 고치러 왔지만, 오랜기간 들어왔던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중풍병자는 율법 속에서 메시야를 발견하고, 드디어 현장에서 메시야를 중풍병을 이유로 만나게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가운데서 구원하실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기하기 위해  것”을 아셨다. 예수님이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중풍병자의  같은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5 22-26예수께서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사람이 그들 앞에서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네  사함을 받았느니라』이 장면에서 서기관들이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믿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네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보다 어렵게 여겨졌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자 말자『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이렇게 되니 서기관들과  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권능이 예수님께 임하신 것을 깨닫게  것이다.『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는 말은 인자가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는 말씀이다. 

 

4.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심

마가복음 3 1-5절『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손이 마르다 라는 헬라어는 ξηραμμνην χων τν χερα”이다. 요한계시록 1415절에서『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엑세란데)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엑세란데가 마가복음 31절에서 엑세람메넨 (ἐξηραμμνην)과 같은 단어이다. 기본형은 엑세라이노인데, 건조한, 마른, 땅을 의미한다.

땅의 곡식을 거두기 위해 휘두르는 낫이라는 표현이다. 땅은 이스라엘(유대주의자)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은 A.D.70년 경에 멸망했다. 땅인 옛성전에서 추수하는 유대인들이다. 이들이 옛사람인 것이다. 

추수는 마가복음 426-29절에서『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추수(종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종말도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도 옛성전(옛사람)이 있다. 옛성전이 무너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되는 것이 바로 추수의 개념이다. 그래서 종말은 역사의 끝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손 마른 사람은 추수되어야 할 사람이다. 추수되지 못하고 있는 자가 손 마른 사람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열매맺는 일인 것이다. 이는 손 마른 자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자가 된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ἔκτεινον τν χερα. κα ξτεινεν κα πεκατεστθη χερ ατοῦ) 내밀다라는 에크테이논(κτεινον)은 에크(~으로부터)와 테이노(내밀다)의 결합된 단어이다. 에크는 자기의 이념이나 사상을 주장할 때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를 동조하는 자는 손을 내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동조하는 자는 손을 내밀라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에크(κ)에 대해서는 골로새서 411절에서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에크 페리토메메스 κ περιτομς)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할례파에서 파벌(부류)에 해당된다. 할례파는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주의자들 중에서 복음을 깨닫고 신앙을 지키는 자가 있었는데,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다.『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에서, 이면적인 의미는 『내(예수님)가 안식의 주인인데, 그 안식의 주인이 하는 일에 동조하면, 너희도 안식에 이르렀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하는 일에 동조하겠느냐』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손 마른 자가 손을 내 밀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두 손 마른 자이다. 추수되어야 할 자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으로서 추수하러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예수께 손을 내민 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완악하다라는 표현이 로마서 116-7절에서 등장한다. Τ ον; πιζητε σραλ, τοτο οκ πτυχεν, δ κλογ πτυχεν· ο δ λοιπο πωρθησαν,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호 에피제타이 이스라엘) 그것을 얻지 못하고(투토 우크 에피튀켄)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헤 데 에클로게 에퓌튀겐)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호이 데 로이포이 에포로데산)』우둔하여졌다는 헬라어 단어는 에포로데산 (ἐπωρθησαν)으로서, 완고하다, 완악하다는 의미다.

『호 에피제타이 이스라엘( πιζητε σραλ) 그런데 그(하나님)를 이스라엘이 열심히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열심히 찾고 있다는 것이다.

『투토 우크 에피튀켄(τοτο οκ πτυχεν)』 그들이 그것을 얻지 못한다 라는 의미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퓌튀켄(위에서 우연히 발견하다)은 한글 개역개정에는 얻다 라고 번역되었지만, 에퓌(~위에서)와 튕가노(우연히 발견하다)의 합성어이다. 그들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우연히 발견하는 것을 말해준다.

『헤(여성 단수명사) (δ그런데) 에클로게(κλογ택함을 받은 자) 에퓌튀겐(πτυχεν순간적으로 만나다)』 그런데, 그 택하심을 받은 자가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호이(ο) (δ 그런데) 로이포이(λοιπο 남성복수:여분으로 남겨진) 에포로데산(πωρθησαν완고하게 된다)』여기서 레암마와 로이포이는 다른 의미다. 레암마(로마서 11 5: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는 쓰고 남은 찌거기를 의미한다. 찌거기이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택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이포스는 여분으로 남겨진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선택받지 못한 남은 자를 의미한다. 로이포이는 복수로 사용되어 그런 자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포로데산(기본형:포로오)은 돌처럼 굳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완고해진 것은 율법을 고수하므로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5. 열두해 혈루증의 여인이 나음을 받다

마가복음 525-34절에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낳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는데, 누구냐 라고 묻자, 그녀가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πστις σου σσωκν σε)』이게 무슨 의미인가? 한글 개역개정 성경으로 보면, 구원이라고 표현했는데, 헬라어 성경은 치료했다는 말이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인데, 병자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분명히 치료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 믿음이 질병을 낫게 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병자의 믿음을 통해서 병자를 치료하게 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의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병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나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환자들이 있으며, 그 중에서 병으로 고통당하고 죽어간다.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안수기도를 받으려 하고, 또 기도원을 찾아서 열심히 병이 낫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이 죽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낫기를 얼마나 강하게 열망하겠는가?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병을 고친 사례와 오늘날 열심히 기도를 해도 죽어가는 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있고 없음의 차이인가?

예수님이 칠십인을 세우시고 전도여행을 보내셨다. 누가복음 10 8-9절에서『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예수님의 제자들도 병자들을 치료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었다. 오늘날에도 초대교회 당시와 같은 병 고침의 놀라운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가?

두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병을 고치는 자와 병을 고침을 받는 자의 상황이다. 병을 고치는 자는 고린도전서 129절에서는『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성령이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도 준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말씀이 된다. 그리고 병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쳐준다는 확실한 믿음이 또한 필요하다는 말이다. 결국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해서 병 고침이 일어난다. 성령으로 병을 고치는 이유는 구원과 관계가 된다.

고린도전서 1210-11절에서『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그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40절에서『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신비주의가 등장한다. 신비주의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병을 치유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교회 사람들이 그 광경에 환호하며,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정말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이비에 불과한 자들인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병은 두가지로 대별된다. 육체적인 병과 영적인 병이 있다. 물리적인 병은 오늘날 현대 의학이 발전해서 극히 일부의 병을 제외하고 얼마든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까지 왔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병은 주로 마음이나 영적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죄와 연관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혈루병, 나병환자, 눈먼 소경, 손마른 자, 앉은뱅이를 치료하셨는데, 이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인간들이 이런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병을 고친다는 의미는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얻게하는 목적이 들어있는 것이다. 병에 걸린 것과 죄를 연계시킨다.

 

6. 스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마가복음 7 26-30절『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과 가나안 여자가 대화하는 내용이다.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는데,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했다. 그런데 마태복음15 24절에서는『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라고 하시면서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표현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알고 있었다. 마태복음 1522절에서『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여인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이『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응답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 전파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주었으며,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광야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종의 멍에를 메는 것과 같은 미련한 일인 것이다. 빌립보서 3 2절에서『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몸을 상해하는 일은 율법에 따라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개와 행악 자와 육체에 할례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율법에 대해서 다 죽었는데, 다시 율법을 적용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무시하는 개와 같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율법을 지켜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복음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나왔는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여전히 율법을 따르려고 하며, 죄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개와 돼지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사해졌지만,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판단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개, 돼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개와 돼지들이 교회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발로 밟고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회유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이키도록 한 것이다. 그들이 핍박과 회유를 해서 성도들을 괴롭혔다.

요한1 5 16절에서『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사망에 이르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죽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율법 아래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다 가져 가셨음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날마다 죄를 회개하여 죄용서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된다. 이 같은 자들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죄의 용서를 빌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는지 먼저 점검해보아야만 한다. 죽지도 않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죄 용서의 회개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로마서 6 7절에서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마태복음 12 31절에서『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회개하는 자에게  세상의 모든 죄와 훼방은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말을 증거할 때, 이를 믿지 않는 자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이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훼방죄를 범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죄를 가져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회개하고, 성화를 이루려고 하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바로 성령훼방죄를 범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루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를 점검해야만 한다.

그래서 성령훼방죄를 범하는 자마다 성경 (마태복음 76) 에서 말하는 개와 돼지와 같은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으면, 죄의 종이 되며,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된다. 죄의 종이 된 자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자다. 그러나 율법에서 벗어나면 죄로부터 자유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을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었지만, 들을 귀없는 자들은 듣지 않았다. 세리와 죄인들은 들었지만, 바리새인들을 듣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폐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닌 것이다.

 

7.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다

 

마가복음 732-35절『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귀는 들을 귀를 의미한다. 세상의 말을 듣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을 듣지 못하면, 이는 영적으로 귀먹은 자인 것이다. 말 더듬는 자는 하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복음을 전하기는 하는데, 진리의 말씀이 왜곡되어 전하므로 배나 지옥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인 것이다.

손가락(다크틸루스 δακτλους)을 그의 양 귀(오타 τα)에 넣고(에발렌 βαλεν) 침을 뱉어(프튀사스 πτσας) 그의 혀(글로세스 γλσσης)에 손을 대시며(헾사토 ψατο)

손가락인 다크틸루스는 어근이 데카(:10)이다. 마태복음 2024절에서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열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손가락은 완전한 권세를 가지는 분이라는 표현이다. 오타()가 적용된 문장은 누가복음 421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여기에서 귀는 영적인 귀를 의미한다. 영적인 귀가 열린 자는 예수님의 완전한 권능이 임하는 것이다.

에발렌은 던지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마태복음 310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누가복음 1435절에서『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예수님이 영적 귀가 열리지 않으면, 던져버린다. 그러나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권능이 들어가는 것이다.

프튀사스는 침을 뱉다 라고 번역했는데, 두루마리를 접다 라는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 420절에서『책을 덮어(프튀사스)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두루마리(성겨)을 접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접어놓는 것이다.

글로세스는 혀, 언어, 방언의 의미를 갖는다. 고린도전서 145절에서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글로세서)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헾사토는 만지다, 소속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헾사토의 어근은 헾사스(불을 붙이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누가복음 816절에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곳이 요한계시록 322절이다.『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오늘날 교회를 예표한다. 오늘날도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는데,『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셨다. 보통 교회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행위』를『믿음이 없고, 열심이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교회를 안나오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행위는 어떤 일에 관계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6 27절에서『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즉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관계되는 일이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 관계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즉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 그 영생을 얻는 일에 대해서『더웁지도, 차지도 않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고,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했다. 내 입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입에서는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데, 그 말씀인즉『너는 미지근해서,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못하도다』 라고 하셨다. 이런 것이 미지근한 상태이다. 교회를 향해서『부자라고 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를 말한다.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그렇지 못하다 』라고 하신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곤고한 자요, 가난한 자, 눈먼자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네가 교회에 다니면서 죄사함받고,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가난한 자요 곤고한 자요 가련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예수믿고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지만『예수님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믿는다고 말은 하지만『율법에 얽매이면서도 성령도 좋고 율법도 좋고』하는 식으로 자기들의 생각대로 믿는 자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이런 자들은 실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지 못하여, 여전히 그 앞에 수건이 가려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고린도후서 3 14절에서『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수건이 가려져 있어서 율법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자』라고 지적하신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예수님은 교회 문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그런데, 들을 귀가 없으므로 문을 열지 못한다. 『문을 열지 않으므로 예수님이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말이다.이 말은『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죄사하심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받고 구원을 얻었다』라고 한다면 율법과는 관계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율법 위에 계시는데,『예수를 믿는다』라고 하면서 예수 밑에 있는 율법을 믿으면 곤란하다.

예수님은『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라고 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다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데,『내(예수님)게서 불(성령)로 연단한 금 (하나님 말씀)을 사라』고 하셨다. 성령에 의해서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자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뜻이다. 흰옷은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흰옷을 사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벌거벗었다』라는 것은『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말이다.『안약을 사서 발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이 열어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눈이 열어져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라』는 말이다. 만나라는 말은 십자가의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회개하라, 무릇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열심을 내라』라고 하셨다. 회개하라는 말은『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말이다.『세상에 잘못한 일을 반성하라』는 말이 아니라『세상으로 향하던 것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말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회개하라』는 말은『예수님이 문밖에 있으므로 예수님께로 돌이켜서, 문밖에 계신 예수님을 문 안으로 들어오게 하라』는 말이다. 그냥 예수님을 향해서 들어오라고 해서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될 때,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겠다』고 하셨다. 이기는 자는 예수님처럼 이겨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버리심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세상에 대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기신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 대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이기신 것이다. 로마서 8 3-4절에서 설명하고 있다.『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이니라』우리는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을 이룰 수 없지만,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8. 뱃세다에서 맹인을 고치시다

마가복음 8 22-26절『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

넷슬알란드 성경과 스테파누스 성경은 차이가 있다. 스테파누스 성경은 726절에서 μηδ ες τν κμην(코멘) εσλθς.(또 마을 안에서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라는 부분이 있는데, 넷슬알란드 성경에는 없다. 개역개정 성경과 영어성경(niv)에도 없으며, 그러나 kjv성경은 스테파누스 성경을 번역하므로 nor tell it to any in the town이 표현되어 있다.

한글 개역개정과 헬라어 성경의 내용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맹인으로 번역된 뒤플론(τυφλν)은 투포우 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교만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디모데전서 36절에서『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교만한 자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자를 의미한다.

핲세타이(ψηται)는 만지다 손을 대다 라는 의미 외에도 관계되다 라는 의미가 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733절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헾사토의 어근은 헾사스(불을 붙이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누가복음 816절에서『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에필라보메노스(πιλαβμενος)(목표 달성을 위해) 굳게하다 또는 붙잡다 라는 의미로서, 사도행전 927절에서『바나바가 데리고(에필라보메노스)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그리고 누가복음 947절에『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에필라보메노스) 자기 곁에 세우시고』여기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율법주의자(맹인)에게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해 굳게 붙잡는 의미가 된다.

옴마타(μματα)는 눈으로 번역되었지만, 어원은 옾타노마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자는 율법으로 눈이 향하게 되어있다. 율법을 지켜 의를 행하는 자가 바라보는 것은 율법의 규율인 것이다.

프튀사스(πτσας) 는 침을 뱉다 라고 번역했는데, 두루마리를 접다 라는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 420절에서『책을 덮어(프튀사스)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두루마리(성경)을 접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접어놓는 것이다.

에피세이스 타스 케이라스(πθηκεν τς χερας 안수하시고로 번역)에서 에피는 분배의 의미에서 무엇인가 위에 첨가하는 것을 의미한다.타스는 관사이고, 케이라스는 손 또는 권능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66절에서『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블레페이스(보이느냐)와 아나블레파스(ναβλψας)보이나이다)에 대해서, 예수님은 블레페이스로 물었는데, 대답은 아나블레파스이었다.  블레페이스는 보다, 알다, 깨닫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깨닫느냐 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육의 눈으로 보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질문하는데, 그는 육의 눈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이다.

『나무 같은 것들(안드로푸스 호티(관계사) 호스(와 같은) 덴드라 νθρπους τι ς δνδρα)이 걸어 가는(페리파툰타스 περιπατοντας) 것을 보나이다』

안드로푸스는 사람이다. 에베소서 35절에서『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안드로포스)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비밀이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는 나타났다는 것이다. 다른 세대는 성령이 없는 세대를 의미한다. 다른 세대의 사람의 아들들은 율법주의에 사로 잡혀 있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덴드라는 드뤼스(상수리 나무)에서 유래된 것으로, 무화과 나무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아는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는 영적 맹인으로서 그가 보는 것은 율법주의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페리파툰타스(περιπατοντας) 는 행동하다, (말씀 교리 등에) 따르다 라는 의미다. 에베소서 41절에서『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페리파테사이)

오프달무스(φθαλμος)는 앞부분의 옴마타와 같이 눈으로 번역했다. 오프달무스는 오프타노마이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오프타노마이는 호라오 라는 단어의 변형형이다.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는 히브리서 928절에서『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호라오)』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에페데켄 타스 케이라스(πθηκεν τς χερας) 다시 안수하시니)와 앞부분의 에피세이스 타스 케이라스(안수하는) 것의 차이에서, 에페데켄은 더하다, 눕히다, 입다 등의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 440절에서『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에피세이스(πιθες)는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을 그속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해 기적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권능있는 메시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를 무너뜨리는 그런 메시야로 생각했다. 그런데, 두번째, 에페데켄(πθηκεν) 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그리스도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어있는 병자들이 예수님의 손과 연합되어 죽고, 그의 손으로 일으키니(부활) 병이 다 고쳐진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율법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가 주목하여(디에블렢센 διβλεψεν) 보더니(아페카테스테 πεκατστη)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텔라우고스 τηλαυγῶς) 보는지라』

디에블레센은 눈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He opened his eyes)

아페카테스테는 회복되다 라는 의미다. 사도행전 1 6절에서『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아포카디스타네이스)이 이 때니이까 하니』사람은 이 땅에서 범죄한 존재들이다. 세상이라는 감옥에 있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나라가 회복되고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오이콘 οκον)으로 보내시며(아페스테일렌 πστειλεν) 이르시되 마을(코멘 κμην)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이콘은 집, 가정이라는 의미 외에 성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성전으로 보낸 것이다. 이 성전은 그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을 의미한다.

아페스테일렌은 보내다, 파견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마태복음 1040절『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영적 맹인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므로서 그는 예수님이 보내시는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코멘은 마을이라고 번역되었는데, 마을은 이미 세워진 옛성전(돌성전)을 의미한다.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율법주의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넷슬 알란드 성경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μηδ ες τν κμην(코멘) εσλθς.(또 마을 안에서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역시 마을(옛성전)에 있는 율법주의자에게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이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며, 오늘날에도 율법주의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다.

마가복음 8 22-26절 내용을 패러디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는데,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이 하시는 기적 등을 통해서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하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다. 직접 혼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율법학자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해서, 그 사람이 소개하므로 이렇게 성전에 있던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자신이 찾아온 경위를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율법학자이지만, 당신의 능력을 보니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마치 어느 날 밤에 니고데모가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와 묻는 장면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예수를 좋지 않게 보는데, 율법학자가 예수를 만나서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면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사정을 잘 알므로, 이 사람을 데리고 성전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친구여, 하나님 나라는 율법을 잘 지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자기라는 육적 몸을 벗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오.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하는데, 동물을 죽여서 각을 뜨는 것은 죄의 본성인 자기라는 육적 자아가 죽는 의미가 있는 것이요, 그 살을 불에 태우는 것은 혼이라는 옷을 태우는 것이지요, 그래서 희생제사는 비록 동물이 대신 죽지만, 죄인도 죽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희생제사를 통해서 날마다 죽는 동물을 대신해 메시야가 세상에 와서 백성들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성경에 있지 않는가. 그 메시야가 바로 나라는 말이야. 나를 통과 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지. 이제 좀 알아듣겠는가?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조금은 알 것 같지만, 여전히 율법이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속 시원히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셨는데, 왜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는가 라고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의미는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 대속한 자와 연합되어야만, 죽었던 영이 부활할 수 있는데, 내가 먼저 그렇게 될 것이고, 이것을 믿는 자도 부활할 것이라는 말을 잘 설명해 주었더니, 율법학자는 그제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제 돌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예배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옛성전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옛성전에는 율법주의자들만 득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성전도 찾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율법학자들도 만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9. 맹인 바디메오가 고침을 받다

마가복음 10 46-47절『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에 들어섰는데, 가장 먼저 만난 것이 바로 여리고 성이었다. 여리고 성은 여호수아서에 따르면 단 칠일 만에 무너져 함락되었고 그리고 성벽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의 의미는 성도의 옛사람이 무너짐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7)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완성된 창세기 21절의 말씀의 성취인 것이다. 땅의 군대는 범죄한 천사로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에서 죽어야 할 인간이 된 자들, 그리고 하늘의 군대는 하나님 나라의 천사들이다. 이러한 배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이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 성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모습이다. 장차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옛성전의 무너짐)과 부활(새성전의 세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가복음 1048-49절『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맹인 거지는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율법주의 속에 갇혀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오늘날 여리고 성을 통해서, 장차 이루어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알지 못지 못하는 자들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 알지, 신도 역시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가『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맹인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사렛(나자르)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자르이다. 나실인의 히브리어 나지르(נְזִ֧יר)' '바치다, 거룩하게 하다, 구별하다'는 뜻의 동사 '나자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의미한다.

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는 민수기 9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을 출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나실인은 포도 나무에서 나는 것과 독주를 먹을 수 없으며,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하고, 시체를 가까이하여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도 안 되었다. 이러한 나실인의 규례는 구속사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사로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마지막 사사인 삼손 이야기는 다윗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는 마태복음 11절에서 등장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히우)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게네세오스)라』게네세오스(γενσεως)는 세대(generation)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세대를 의미한다. 그 당시 한 세대는 주로 30-40년 정도로 여겨진다. 즉 그 사람이 사역()하는 기간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이다. 히우는 아들(자손)이라는 의미다. 아들은 육신의 혈통으로 된 아들이 아니라, 사역을 할 수 있는 자로서 아들이라는 의미다. 당시 남자들만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성인이 된 남자를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아들은 후손이라는 개념보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서 아들인 것이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이 자녀들 중에서 주로 한 사람을 등장시킨다. 가끔 두명도 있지만 한명을 등장시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를 이어가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열네대, 열네대, 열네대를 삼등분하여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 42 세대가 된다. 42세대가 진행되는 동안 믿음의 세대가 한 사람씩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이어져 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죽음과 부활로 요약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 50-51절『맹인이 겉옷(히마티온)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히마티온(μτιον)은 옷인데, 마가복음 656절에서『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히마티온)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예수의 옷은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몸을 의미한다. 겉옷을 내버린다는 의미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예수에게로 달려가 연합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맹인(하나님 나라에 대한 맹인)은 부활의 그리스도(메시야)와 만나서 눈을 뜨게 된다는 예표이기도 하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아나블렢소)』아나블랲소(ναβλψω)는 쳐다보다 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418절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튀플로이스) 자에게 다시 보게(아나블렢신)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여기에서 아나블랲신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다. 튀플로이스는 튀플로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교만하다는 의미를 갖는다. 교만하여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를 의미한다. 바디메오는 메시야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알고자 하는 자를 상징한다. 예수를 찾아온 많은 유대인들은 바디메오와 같은 맹인인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알고자 찾아온 것이다.

마가복음 10 52절『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휘파게 παγε) 네 믿음(피스티스 πστις)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세소켄 σσωκν)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아네블렢센 νβλεψεν)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휘파게는 은둔하다, 아래로 향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당장 나를 떠나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라는 것이다. 우월한 선민의식을 갖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주의에서 자신을 낮추어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믿음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자신(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을 발견하게 되고, 그 분이 날마다 드리는 제사의 영원한 대속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런 메시야를 바로 앞에서 발견하였으므로 그는 상한 마음을 치유받게 되는 것이다. 세소켄은 구원이 아니라 치유받았다는 말이다. 치유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바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게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드렸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로마를 무너뜨릴 그런 힘있는 메시야로 생각했다. 그들은 메시야를 발견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사실상 맹인 그대로인 것이다. 육적으로 눈을 떴을 것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맹인이 된다.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 상한 마음을 치유받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은 상한 마음을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소리쳤다. 물론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신도 역시 교회로 인도되었지만, 현재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지 않으면, 구원받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바리새인들과 논쟁

 

1. 금식 논쟁

마가복음 218-20절『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표적인 경건 중의 하나가 금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에 온 백성으로 금식하도록 명하셨다. 그 날에는 제사장도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으며, 향을 피우고 피를 뿌리며 하나님께 나아갔다. 더불어 온 백성도 먹기를 그치고 함께 나아가야 했다. 또 어떤 일로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질 때면 그들은 온 종일 금식하며 울어야 했다. 자기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며 먹기를 그치고 울어야 했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금식의 모습이다. 구약의 질서에 따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은 그들의 경건모습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라고 묻고 있다. 주님은 자신을 혼인집의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의 손님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기쁨의 혼인잔치가 시작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시므로 금식의 문제에 대해 답하고 계시다.

지금도 구약적인 의미로 금식을 가르치고, 마치 그것이 의의 한 기준이나 되는 것처럼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복음으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맞지도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새로운 천을 잘라서 낡은 구멍난 옷에 붙여 짜집기 한 것과 같은 부조화스러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요한의 제자들의 틀에 매인 금식요구에 대하여 주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라고 하셨다. 만약에 그렇게 하면 새 옷의 천은 긴장도가 강하기 때문에 헌옷에 대고 짜깁기 해봤자 헌옷을 오히려 더 해어지게 하고 만다.

예수님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기준으로 하는 낡은 옷이 아니라, 성령의 법으로 하는 생베라는 것이다. 그래서 섞일 수 없는 것을 말해주신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낡은 베를 생베에 붙이는 일들이 계속이어지고 있다. 성령을 믿으면서도 율법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새 언약이 하나님이 택하신 새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것이다. 새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를 말한다. 요한복음 3 3-5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옛사람은 바로 자기라는 악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물은 율법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첫 갈릴리 지방의 가나라는 곳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런데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바닥이 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불완전한 혼인잔치, 즉 구약의 상황을 말해주신다. 요한복음 2 6-7절에서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돌 항아리 여섯은 율법을 나타낸다. 그 속에 있는 물은 손을 씻는 물로서 죄를 씻어 정결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약의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항아리에『물로 채워라』고 하셨다. 이는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다. 그래서 물은 죽음을 나타낸다. 세례의식에서 물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서 6 4절에서『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 포도주는 예수의 보혈을 상징한다. 죄를 씻는 문제가 구약에서는 물로 표현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의 보혈로 나타난다. 보혈의 의미는 구속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예수의 피값을 사탄에게 주고, 회개하는 죄인들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들은 예수와 함께 못박힌 자가 된다. 로마서 6 2절에서『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로마서 66-7절에서는『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법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율법의 기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으로 부터 주신 그 때로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까지 해당된다. 예수님은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과 성령의 법을 비유하셨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등불을 켰으나 다른 기름통을 준비하지 못한 자라고 하고, 슬기로운 처녀는 등불을 켜고, 다른 기름통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등불은 킨 것은 교회에 초대되어 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기름통은 성령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른 기름통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처녀는 여전히 율법 가운데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의 의미도 모르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말해준다. 율법에 묶여있는 사람과 거듭난 사람이다. 다시 신령한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모두가 율법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죽어야만 한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은 예수와 함께 못박혀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 24-25절에서『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이 태어난다. 새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바로 부활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살아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로마서 6 8-9절에서『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육적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 죽으셨다. 그와 함께 죽은 자는 마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몸이 죽은 것을 믿어야만 한다. 미래 육이 죽을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현재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44절에서『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2. 안식일 논쟁

마가복음 2 23-28절『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쉬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세기 1 1절에『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는 안식 그 자체다. 성경(요한계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는 자가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나님 스스로가 안식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안식을『쉰다』라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또 일해야 하는 날이 오지만, 하나님 나라 안식에 들어가면 일하고 쉬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천지창조를 하기 전에는 안식이었는데, 천지창조를 하게 되므로 안식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천지창조를 다 끝내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손을 떼시고 안식을 하신 것이다. 창세기 2 1-3절에서『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고 안식하시니라』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안식과 같은 것이다. 천지창조에서 말하는 안식은 이 세상에서 창조의 일이 끝나는 멈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라는 말은 세상에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날에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날은 물질세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날이다. 하나님이 물질세계 속에서 이 날에 복을 주신 것은 물질적 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을 주신다는 말이 담겨져 있다. 즉 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 하나님이 영원한 안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안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4 8-10절에서『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그런즉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것은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자이다. 참 안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는 말이다. 참 안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참 안식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안식에 들어간 자이다.

에베소서 2 6절에서『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의 옛사람(육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사람(영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 가운데 일으키심을 받는다. 그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움을 받는 것이다. 골로새서 3 3절에서도 마찬가지로『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라고 했다. 죽은 것은 옛사람이다. 그리고『새사람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라고 하고 있다. 히브리서 4 10절에서『이런 자들을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 가운데 태어난 자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다. 구약성경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도록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다.

출애굽기 20 8-10절에서『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십계명 중의 하나로서 율법에 관한 규정이다.

출애굽기31 12-14절에서는『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민수기 15 33-36절에서는『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고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지는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마태복음 223-24절에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정한 규정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12 8절에서『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된다. 그러므로『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번이라도 어기면 반드시 율법으로 죽게 될 것이다. 율법 속에 있는 안식의 규정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은 참 안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으며, 율법의 요구대로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는데, 다시 율법의 요구대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율법의 요구대로 예수님과 함께 다 죽었고,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여전히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율법 아래 죽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사도바울이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장사되고, 부활과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은 것을 믿는 것이다. 죽은 것은 율법 안에서 죽은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있다. 예수와 연합한 자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안식한 자들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율법에서 속량된 자라고 하는 것이다. 율법에서 속량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안식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죄가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므로 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다. 내 힘으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힘으로 율법을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자들이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안식에 못들어간 자들이다.

 

3. 장로들의 전통

 마가복음 7 5-9절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갈릴리 지방에 계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사항을 가지고 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의 정결의식인 손씻기를 소홀히 한 까닭이다. 그들은이를 "장로들의 전통"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종교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음을 비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항이 아니니 죄를 범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지키는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께 불경한 것으로 정죄하고자 했다.

"장로들의 전통"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한 복종에 열중하여 전통적인 관습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계명 주위에 속박이 되고 장벽이 되었다. 그 개념은 성경적 계명으로부터 신실한 유대인들이 넘어지는 것을 방어하는 장벽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08절에서 11절 까지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에 대해 장로들의 전통은 "추수는 일이다, 손으로 알곡을 자르는 것도 추수다, 그러므로 그들이 장로의 전통으로 생각할 때, 예수의 제자들이 들판을 지나갈 때 알곡을 잘라 먹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지은 것이다,

출애굽기 3017절에서 21절 까지에서는 제사장들은 희생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물두멍에서 그들의 수족을 씻으라고 명령하셨으며 이에 대한 장로들의 전통은 "모든 사람들은 먹기 전 음식으로 부정한 것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손을 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 몸이 정결치 못하게 된다, 위생적인 예방 차원이 아니라 의식적 행위로서 손목 위로 물을 흘리는 것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에 대한 장로들의 전통은 "돈을 하나님께 바쳤을 때, 그것이 그들의 늙은 부모를 공양하는데 돈을 사용하는 의무로부터 아들을 자유롭게 한다" 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에 해박한 서기관들을 꾸짖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신 방향으로 사람들에게 율법의 부담과 멍에를 과도하게 지운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수가 위선자들로서 하나님께 향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보다 외견상 경건함과 의로움을 드러내고자 많은 노력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인 믿음을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워 지는 것은 밖으로 보이는 다수가 따르는 관례적인 행동의 부족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로 인해 더러워 진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따르고 실천해야 할 본질적인 행동 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내세워 하나님의 뜻을 변질시켰다고 꾸짖은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사회 지도층에 대한 비판과 적대적 행위는 그들을 격분시켜 예수를 해칠 명분을 쌓게 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유대지도자들을 자극할 것을 인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행하기를 원하는 본질적인 의도와 가르침을 설파하였지만,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기존의 가치체계와 그들의 정당성 그리고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실족하기에 이를만큼 충격적인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4.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마가복음 1127-33절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전 심판을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나타나자 유대 지도자들의 도전이 시작된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비유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려 주시지만, 그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부터 중요한 주제들을 드러내셨다. 예루살렘 입성에서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셨고,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 청결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채 오랫동안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와 겉만 화려한 성전유대교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리고 “권위(권세)” 주제를 다룬다. 종교지도자들은 전날 성전 뜰을 엎으신 것을 무슨 권위로 행한 것이냐고 도발하면서 논쟁이 시작된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신적 기원을 갖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부여하지 않은 권위를 가지고 예수가 소동을 벌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예수는 그들에게 있어서 이단자이다. 이에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를 통해 그들의 권위의 허상을 들춰내신다. 메시아로서 성전을 심판하신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그들의 질문을 물리치고, 이사야 5 1~7절의 포도원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악한 소작인이 되어 포도원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명을 듣지 않고 결국 그 아들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며 더욱 분노한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 그만큼 전날의 성전 청결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또 앞서 이들은 주님을 죽일 것을 서로 모의했기 때문에 죽일 명분을 찾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지도자들은 두 번 연속 질문을 이어간다. 성전에서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이 “무슨 권세로서” 행한 것인지 물은 것이다. , 그 권세를 누가 준 것인지도 묻는다. 지도자들의 질문은 예수에게 누가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권위를 주었는가의 문제로 정리된다. 지도자들이 문제를 삼은 것은 “이런 일들(타우타)”이다.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은 성전 청결을 통한 심판 행위와 성전의 본질적 기능에 대한 가르침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 청결 행동뿐 아니라 이어진 가르침도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성전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이적에 놀라며 따랐지만, 백성들과 동일하게 보았음에도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지도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지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묻는 질문으로 대답하셨다. 이렇게 질문하신 이유는 종교지도자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에도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한이 베푼 세례는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는데, 성전이 아닌 한 개인이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성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한이 워낙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있어서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역으로 질문하신 것이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미 알고 계셨다. 종교지도자들이 의논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주님의 질문에 당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모든 백성이 요한을 진실로 선지자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의 말이 참되다는 뜻이 되는데, 요한이 전한 말은 자기 뒤에 올 예수가 자기 보다 더 능력이 많은 자라고 예언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인정했으므로 그의 예언은 옳으며, 예수님은 요한 보다 뛰어난 분, 즉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이 된다. 

종교지도자들은 “유구무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요한의 권위의 출처를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들의 불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신다. 포도원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가 선택한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은유다. 포도원을 일구며,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다는 묘사는 이사야 5 1~7절에 나오는 포도원의 노래와 매우 비슷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저버리고 좋은 포도 대신 들포도를 맺은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종을 세 번 파견 하신다. 그리고 각각 모욕을 당하는 정도가 점점 격화된다. “잡아다가 심히 때리다,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다, 죽이다”로 표현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반역이 시간이 갈수록 커졌음을 보여 준다. 반역의 절정은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다. 종을 계속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 그들을 깨우치시려 하신 것을 가리킨다. 특히 “그 종의 머리를 때렸다”는 표현은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마가는 지속적으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이 동일하고, 이를 따르는 제자들의 운명이 상응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전망하게하고, 제자들 역시 그 길을 가게 될 것을 예견하게 한다. 비유에서 주인의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산에서 변화하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농부들은 탐욕이 지나쳤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은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소작인이 주인의 포도원을 차지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주인의 아들을 죽이는 비유를 들려주신 것은 인간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다 우매하여져서 악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드러낸다. 포도원을 소작하는 소작농은 다른 사람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많이 소유하려는 인가, 결국 자멸에 이르는 인간을 표상한다. 

마가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 시편 11822-23절을 인용한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하심을 이야기할 때 자주 논한 말씀이다. 특히 “버리다(아포도키마조)”는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단 두 곳에 사용된 단어인데, 8 31절의 수난 예고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버림받을 것을 예언하실 때 사용하였다. “건축자들”이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악한 포도원 농부들처럼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예수님의 의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로 사도행전 4 11절과 베드로전서 27절에서도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셨음을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역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며,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위가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와 오늘날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1618절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요한일서 54-5절을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심에 보듯이 성도의 권위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와 함께 죽고 현재 부활한 것을 믿는 자가 된다. 부활이 바로 이런 권능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부활을 장차 육체가 죽고 난 뒤에 일어날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적이 없는 자들이다.

 

5. 서기관들을 삼가라

마가복음 1238-40절『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서기관들은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회당 안에 두루마리 성경이 보존되어 있는 거룩한 궤 앞에 회중을 향하여 특별히 구별된 긴 의자가 있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존경심을 품은 회중의 주시를 받을 수 있었다. 서기관들은 잔치의 가장 높은 자리를 좋아했다. 연회의 상석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가장 상석은 주인의 오른쪽 자리이며 두 번째 상석은 주인의 왼쪽 자리였다.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번갈아가며 테이블을 돌아가면서 순서대로 자리가 정해졌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명성은 그가 앉아 있는 자리로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행동은 거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지 하나님께 보이려고 길게 기도 한 것이 아니었다. 서기관들은 기도할 때 그들이 얼마나 경건한지를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장소와 방법으로 기도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금식으로 수척해진 모습을 하고 사람들이 많은 사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구체적 죄상을 폭로하는데,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착취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켰다고 말씀한다.당시 과부들은 고아들과 함께 경제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 보호 대상자였다. 약자의 재산을 착취하는 행위가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 흔히 있었던 것임을 반증해 주고 있다. 서기관들은 그들에게 위임된 율법적 판결권을 남용하였거나,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과부들의 재산에 손실을 가한다거나, 타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법적 대리인으로서 착취한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

율법학자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해 보수를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무보수로 가르쳐야 했기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힘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랍비들이 풍족하게 살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보다 고상한 의무와 특권은 없다고 가르쳤다. 랍비를 잘 받들어 준 사람이 틀림없이 천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자격을 갖는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종교적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다.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속여서 가산을 가로챘던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남들보다 많이 기도하면서 이런 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제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드러내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본받아야 할 것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항상 가르치셨는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은 듣고 지키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233절에서,“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남을 가르치는 대로, 스스로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식하는 사람들의 표본이 되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3 12절에서『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바리새인들에게 저주의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의로운 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말석으로 떨어지고, 예복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어두운 곳으로 쫒겨난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늘을 우르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5 20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서 스스로 의롭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인데, 그들보다 더 의로워져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래서 교회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믿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자기 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가지는 자기의 의보다 높아지는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에게 들어가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화되도록 노력하고, 날마다 자신을 성찰하여 죄를 짓는지 살펴보면서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그런 것들이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오직 죽은 자같이 되는 것 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데, 자기를 높이려 하는 것이다.

. 영적 전쟁의 핵심

 

1. 영적 전쟁의 대상

마가복음 322-24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모친과 육신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는데, 서기관들이 예수를 바알세불(귀신의 왕)의 하수인으로 규정한다면, 사탄이 사탄을 쫒아내는 결과가 되어, 논리에 맞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은 귀신들린 자에게 하나님의 권능으로 죄를 사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가 없어지므로, 귀신이 그를 지배할 권리가 없어지게 된다. 귀신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죄인을 관리하는 천사이다. 그래서 영적 전쟁의 대상은 귀신(천사)이 아니라, 심령 속에 있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있는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육적자아인 것이다.

마가복음 8 34-35절『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영적 전쟁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와의 전쟁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독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영적 전쟁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그 대상에 대해 거의 대부분 사탄 또는 악한 영으로 말할 것이다.

영적 전쟁도 육적인 전쟁과 마찬가지로 피아식별을 할 줄 모르면 전쟁에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을 하게 되는 나는 누구이며, 그 대상은 누구와 싸우는가를 알지 못하면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유아기를 지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아에 대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기라는 정체성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모르면 전쟁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나타나는 자아는 바로 육적 자아라는 것이다. 이 육적 자아는 대략 일곱가지의 특성을 갖는 집합체 형식으로 되어있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이것은 성장하면서 발전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 자아는 하나님과는 적대적인 대립을 세우기 때문에 육체 속에 갇혀있는 영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도 거부한다.

우리는 영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바르게 설 수 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육체와 영이 결합된 존재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영은 흙이라는 육체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을 하자면, 세상에 살다가 죄를 범하여 감옥에 들어가 있는 어떤 사람과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세상에서 입던 옷과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번호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일정기간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감옥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은 죄수복에 적힌 번호가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 속에 갇힌 영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육체 속에 갇혀 있으며, 혼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감옥 속에 갇혀있는 자가 자신의 이전의 정체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부모를 기억하고 자신이 살던 집을 생각하고, 함께 살아온 가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때만 영적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씨뿌리는 비유로 설명한다. 흙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경작하면서 생명의 싹이 자라듯이 육체 속에 갇힌 영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묵상과 성경의 말씀을 읽으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말씀을 하기를 영이 육체 속에 갇힌 근본적인 원인은 영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그게 탐심이며,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죄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창세기 2 17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죄인은 두번 죽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죽고 죽으리라) 하시니라. 한글 번역 성경은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은 죽고 죽으리라 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두번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나 흙에 갇힌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자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게 회개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첫번째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물세례이다. 로마서 6 3-7절에서 세례와 죄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사람은 스스로 죽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십자가의 죽음으로 회개하는 인간들을 대속하는 것이다. 단지 예수가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것 뿐만 아니라, 함께 죽었음을 믿게 하여 죄인도 역시 죽으므로 죄를 사면받게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성도가 된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백보좌 심판은 율법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된다

두번째 죽음은 혼의 죽음이다. 이것은 불세례이다. 이전의 옷을 벗고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혼은 육체와 영이 만나서 인간이 되는 가죽옷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첫사람 아담에게 입혀주신 옷이다. 그런데, 이는 육체로 비롯된 옷이므로, 그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성령세례인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자는 새로운 옷(영의 몸)을 입으므로 영이 빛을 받아서 살아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43-44절에서는 영의 몸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설명하였다. 영의 몸을 부활한 자의 몸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육체가 있으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자신이 부활한 자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옷을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한 것을 믿을 때,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 이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셋째 하늘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게 재림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는 성도의 심령 속에 천국이 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 속에 육체로부터 나타난 자기의 정체성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자기 정체성이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피아식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참된 나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적 정체성이고, 나의 적은 다름 아닌 육으로부터 비롯된 정체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대상은 육적 자아이며, 부인해야 하는 주체는 영적 자아인 것이다. 이 둘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세상은 영에 대해서 감옥과 같은 곳이다. 세상에도 감옥을 관리하는 자가 있다. 교도소장이 있으며, 부하 직원도 있을 것이다. 죄수를 법으로 통제하고, 불법을 저지를 때는 법으로 처벌하고, 노역도 시킬 수 있다. 영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죄인에 대해서 악역을 맡은 공무원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도소장은 사탄, 그 밑에 있는 자들은 악역을 맡은 천사들이다. 그래서 어두운 영(마귀 등)이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자신이 맡은 바 역할을 다 할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에 대해서 두 번 죽은 자에 대해서는 세상(교도소)을 떠나기 전이라도 죄없음을 인정하는 도장을 찍어준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악역을 맡은 간수들이 더 이상 간여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육체로 인해서 세상에 살아갈 뿐인 것이다. 요한1 3 9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1 5 18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다만,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났더라도, 사탄이나 어두운 영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육적 자아가 괴롭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대로 결과가 주어진다. 성경을 로고스로 받느냐 아니면 글자 그대로 레마로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성령의 능력으로 로고스로 받을 때는 율법에서 벗어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지만, 레마로 받을 때는 여전히 율법 속에 있는 자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사탄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율법 속에 있는 자는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자에게 영적 전쟁이란 말이 어울리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진 성도에게는 영적 전쟁의 대상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전쟁이고, 두번째는 육적 자아에 대한 전쟁이다.

첫째 거짓선지자에 대한 전쟁이다. 마태복음 715절에서『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오늘날 거짓 선지자들은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는 자들일 것이다. 왜곡된 성경 말씀은 잘못된 번역 성경을 사용하는 경우, 잘못된 교리와 의도적 왜곡 등을 들 수 있겠다. 열왕기상 221-40절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람나라와 전쟁을 하여 전략 요충지인 길르앗 라못을 빼앗기 위해 유다왕 여호사밧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여호사밧이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를 물어보았다. 아합이 자기를 지지하던 400명의 선지자를 모으고 물었을 때, 그들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라고 했다. 여호사밧이 이외에 우리가 물어볼만한 선지자가 없느냐 라고 하니, 아합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 선지자가 있으니 저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라고 말을 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미가 선지자에게 물으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다라고 예언을 했는데, 미가의 말을 믿지 않고, 숫적으로 많은 400명의 선지자의 말을 믿고 나가서 전투를 하다가 아합은 죽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 중에 경력이 화려하고 말솜씨는 뛰어나지만 진리를 전파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진리를 전파하지 않으면, 모두 거짓 선지자가 된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을 하지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예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옛사람이 죽고(물세례), 불세례로 혼에 대해서도 죽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성령 세례로 하늘로부터 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에 대해서 벗어났는데도 여전히 율법을지켜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용서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한다고 가르치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나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절기도 잘 지켜나가야 하고,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인 것이다. 이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에 오셨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규칙, 규정은 때로는 필요하지만, 구약의 율법처럼 강제적으로 규정화하여 사람들에게 멍에를 씌운다면 모두가 율법주의자들이 된다. 그리고 기복신앙으로서 마치 구약시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아스라 우상에게 빌었듯이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세상의 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만연된 기복신앙이다.

두번째는 육적 자기와의 전쟁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 성도가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져도 인간의 육체로 비롯된 일곱가지의 육적인 모습은 쉽게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의 전쟁을 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인공지능 등이다. 이전의 “나” 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 일곱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엘로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도가 되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이 일곱가지의 악한 모습을 부셔야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고 가신다.

 

2.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마가복음 3 31-35절에서『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사역을 하는 것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가족에 대해서 영적인 가족을 강조하신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걸림돌은 육적정체성인 것이다. 육적 정체성은 자기라는 것으로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한 진으로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은 이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자기와의 영적 전쟁이다.

마가복음 10 26-30절『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부자가 모든 것을 팔아서 남에게 다 주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표면적으로 받아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기의 육적 정체성을 다 십자가에 못박고,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 남에게 잘 말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일곱가지의 육적 정체성은 그대로 나타난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적 정체성은 일곱가지로 등장한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인간의 육적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첫째 육체의 본성은 감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물질 소유와 성적인 만족감을 채우려는 것이 가장 핵심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극히 조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세상(물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며, 간음하지 말도록 규정하기도 한다.

둘째, 혈연관계는 부모, 형제, 자녀를 의미한다. 아무래도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자녀를 우상처럼 여길 때, 가족관계는 파탄될 수 있다. 그만큼 심각하다. 가정을 유지하는데, 자녀는 핵심요소이지만, 지나치게 우상처럼 여긴다면 오히려 파탄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셋째, 경험과 지식은 영적 신앙생활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적적인 부분이 많다. 사도바울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였다. 그와 같은 기억은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 가장 힘든 기억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한 높은 지식은 하나님 말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사상과 이념은 종교를 부인하고 탄압하는데, 동원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공산 독재주의가 그러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다.

다섯째, 종교심은 신을 찾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심은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끌기도 한다.

여섯째, 자기의 의인데, 선행을 행하고, 자기 규칙을 만들어서 불법을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스스로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한다. 그들은 나아가 스스로 선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사람부터 주목받기를 원하며, 심지어 남을 판단할 때도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일곱째,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항상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남보다 못하면 분노하며, 심지어는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며, 이간질을 하거나, 함정을 파서 넘어뜨리기도 하며, 상대방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상대를 죽이기도 한다. 언어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성도가 이런 육적인 정체성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자기와 싸움에서 완벽한 승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런데『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파라 안드로포이스)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파라 토 데우)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파라 안드로포이스(παρ νθρώποις)는 사람들과 함께는 할 수 없지만 이라는 의미이고, 파라 토 데우(παρὰ τῷ θε)는 그리스도(하나님)와 함께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옆에 있어서 함께 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관사가 없는 데우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임마누엘(파루시아) 신앙을 가진 자는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앞서서 싸워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 정체성과 싸우는 영적 정체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싸우는 것이다.

복음을 위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에게 영적 정체성을 살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육적 정체성을 죽이게 된다. 복음은 혈연관계보다 더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위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마태복음 19 29절에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라고 되어있다) 라는 말은 임마누엘이라는 신앙을 위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임마누엘 신앙이 되면 세상적인 것이 보잘것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신앙은 심령 속의 그리스도(호 로고스)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과 그에 따른 현재적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0 31절에서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 임마누엘 신앙이다. 제자들은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에도 성도는 호 로고스를 따르는 신앙이다. 먼저 된 자는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믿고, 나중에 들어온 자는 신앙이 미약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임마누엘의 신앙을 깨닫게 되어 참 신앙으로 들어간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누가 먼저 되고 나중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신앙으로 나아가는 자가 먼저 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신앙은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지고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파루시안)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이다.

 

3. 고향에서 배척당하심

마가복음 63-6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에스칸달리존토  아우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육의 눈으로 바라보면 배척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나님 아들을 영접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신 자(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갑자기 반기를 든 것이다. 즉 죽으시면 안된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6 21-23절에서『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와 같은 경우가 사도행전 21 10-14절의 내용이다.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성령을 통하여 바울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는 말을 들은 많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도록 권했다.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자기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서 사명을 다 하려 했는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한 제자들은 바울의 죽음을 걱정하여 말리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경우라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제자들은 또한 이를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요한복음 6 29-30절에서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6 38-40절에서『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데오론) 믿는(피스튜온 에이스 아우톤)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마지막 날은 모든 사람에게 종말을 의미하나, 아들 속으로 들어가는 자에게는 육적 죽음을 의미한다. 즉 로마서 6 4-5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아들 속으로 들어가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in christ)에서 믿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자와 연합되는 믿음인 것이다. 

예수를 배척하다 라는 헬라어 에스칸달리존토  아우토  장애물에 걸려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장애물은 육적 눈이다.그들이 예수님의 육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 여기서 『이상히 여기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을 보면 『에다우마젠』이라는 단어인데, 마가복음 5 20절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은 후에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전하였을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다』라고 했는데, 그때 쓰인 단어와 동일하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기이히 여길 ,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 데가볼리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데가볼리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기이히 여겼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완고한 불신을 이상히 여기셨다.

 사건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중요한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들도 앞으로 직접 전도 사역을 감당할 때에 이런 배척을 경험하게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번째로 고향 나사렛을 떠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다. 나사렛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촌을 돌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후에 고향 나사렛 주변의 모든 마을을 돌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 둘씩 전도 여행을 보내셨다. 이러한 내용들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4.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

마가복음 8 14-20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예수님은 떡 일곱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사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이 기적을 본 유대인들은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고 믿어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며, 더 큰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사람의 눈으로 보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기적을 보여주시고,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달마누다 라는 지방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이 보기에 먹을 식량이 물고기 한 개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남겨진 빵을 생각하고 가져오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보면 먹을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순간 잊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더 많은 표적을 요구한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원하는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를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만 있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누룩은 빵을 부풀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통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아야 하는데, 계속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허점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육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누룩의 요지는 죄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누룩은 죄를 상징한다. 누룩은 부풀게 하지만, 원래의 것을 변형시킨다. 그래서 누룩은 거짓된 것을 상징한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고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위선이요, 외식하는 자인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더 깍아 내리기 위해서 함을 쓰는 모양이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제사장 그룹인데, 감히 시골뜨기 같은 자가 메시야 라고 말을 하고 기적을 일으키니 몹씨 마음이 상한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일 방도만 생각하는 것이다. 계속 그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는 것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룩이 빵에서 퍼지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죄로 가득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헤롯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마카비 전쟁으로 세운 하스모니아 왕조가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고 난 후에, 당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와 전쟁(악티움 전쟁) 중이었는데, 헤롯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속이고, 자신을 유대의 왕으로 세워주면, 자신이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되는 것을 돕겠다고 거짓으로 협상하여, 결국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거대하게 재정비했다. 그는 항상 유대인에게서 메시야가 출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소문으로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헤롯은 자신이 왕으로 계속 있으려면 메시야로 태어난 이기를 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서기관들을 불러 모아 메시야기 어디서 태어나는 물어보았는데, 베들레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아기들이 죽는 참상이 벌어진 것이다. 왕이 되기 위한 욕심과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그의 잘못된 생각은 누룩처럼 계속 번지고 번져, 아이들을 몰살시키는 그 지경에 이른 것이다.

헤롯의 누룩은 아들에게까지 이어진다. 헤롯 안디바는 '아버지를 대신한 영웅의 아들'이란 뜻으로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B.C.4-A.D.39)이었다. 헤롯 안디바는 자신의 조카이자, 이복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재혼을 했는데, 세례 요한이 자기가 불법으로 동생의 아내와 재혼한 것을 꾸짖자, 자신의 죄를 돌이켜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무죄한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헤롯 안디바는 부도덕하게도 동생의 아내와 재혼하는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의 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헤로디아의 불법 재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결국 세례요한을 죽이는 또다른 죄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단 일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생적으로, 또한 연쇄적으로 다른 모양의 죄를 짓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야고보서 114-15절에서『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이유는 당시 제자들도 예수님을 로마를 무너뜨릴 수 있는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크냐 라고 다투기도 하였고,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면 자신을 우편에 좌편에 앉기를 바라는 모습들을 보였기 때문이다. 인간적 욕망으로 예수를 바라보면, 누룩처럼 그 생각이 확산되고 번지는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이 그러했다. 가롯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에게 팔아버렸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엄청난 권능을 발휘할 줄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욕당하고 십자가의 형장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목을 매고 자결해버렸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섰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버렸다. 욕망의 잘못된 생각이 계속 누룩처럼 번지는 것이다. 그래서 누룩처럼 번진 생각이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은 기복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 일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이용해서 장사하는 자들,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행위 등 수많은 인본주의 종교행위가 바로 누룩인 것이다.

 

5. 나와 복음을 위하여

마가복음 10 26-30절『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부자가 모든 것을 팔아서 남에게 다 주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표면적으로 받아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기의 육적 정체성을 다 십자가에 못박고,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 남에게 잘 말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도 일곱가지의 육적 정체성은 그대로 나타난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적 정체성은 일곱가지로 등장한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인간의 육적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첫째 육체의 본성은 감정적인 부분도 있으나, 물질 소유와 성적인 만족감을 채우려는 것이 가장 핵심일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극히 조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세상(물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며, 간음하지 말도록 규정하기도 한다.

둘째, 혈연관계는 부모, 형제, 자녀를 의미한다. 아무래도 자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자녀를 우상처럼 여길 때, 가족관계는 파탄될 수 있다. 그만큼 심각하다. 가정을 유지하는데, 자녀는 핵심요소이지만, 지나치게 우상처럼 여긴다면 오히려 파탄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셋째, 경험과 지식은 영적 신앙생활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부적적인 부분이 많다. 사도바울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였다. 그와 같은 기억은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 가장 힘든 기억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또한 세상에 대한 높은 지식은 하나님 말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사상과 이념은 종교를 부인하고 탄압하는데, 동원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공산 독재주의가 그러했으며, 현재도 진행중이다.

다섯째, 종교심은 신을 찾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심은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이끌기도 한다.

여섯째, 자기의 의인데, 선행을 행하고, 자기 규칙을 만들어서 불법을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스스로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한다. 그들은 나아가 스스로 선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사람부터 주목받기를 원하며, 심지어 남을 판단할 때도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일곱째,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항상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남보다 못하면 분노하며, 심지어는 상대를 괴롭히기도 하며, 이간질을 하거나, 함정을 파서 넘어뜨리기도 하며, 상대방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상대를 죽이기도 한다. 언어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성도가 이런 육적인 정체성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자기와 싸움에서 완벽한 승리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그런데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파라 안드로포이스)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파라 토 데우)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파라 안드로포이스(παρ νθρποις)는 사람들과 함께는 할 수 없지만 이라는 의미이고, 파라 토 데우(παρ τ θε)는 그리스도(하나님)와 함께 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옆에 있어서 함께 하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관사가 없는 데우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임마누엘(파루시아) 신앙을 가진 자는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앞서서 싸워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 정체성과 싸우는 영적 정체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싸우는 것이다.

복음을 위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에게 영적 정체성을 살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육적 정체성을 죽이게 된다. 복음은 혈연관계보다 더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위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마태복음 19 29절에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라고 되어있다)라는 말은 임마누엘이라는 신앙을 위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임마누엘 신앙이 되면 세상적인 것이 보잘것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신앙은 심령 속의 그리스도(호 로고스)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과 그에 따른 현재적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 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031절에서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이 임마누엘 신앙이다. 제자들은 다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에도 성도는 호 로고스를 따르는 신앙이다. 먼저 된 자는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믿고, 나중에 들어온 자는 신앙이 미약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임마누엘의 신앙을 깨닫게 되어 참 신앙으로 들어간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누가 먼저 되고 나중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 신앙으로 나아가는 자가 먼저 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신앙은 현재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지성소)이 세워지고 하나님이 성전에 임재(파루시안)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

 

.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

 

1. 씨뿌리는 비유

마가복음 43-9절『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3 11절에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여기서 너희는 제자들이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제자가 된다. 왜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가? 『자기』가 바로 영을 죽이는 육의 옛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영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 영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이탈되어, 이 세상에 갇힌 것이다. 성경은 에베소서 5 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교회는 성도의 영을 말한다. 영이 이 세상의 물질인 흙에 갇히므로서 죽어버리고, 인간이 된 생명체는 혼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자가 누구이며, 씨가 누구인지, ()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씨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며, 씨는 하나님 말씀이다. 밭은 사람들의 마음을 말한다. 요한복음 15 1절에서『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하나님이 농부이며, 씨뿌리는 자다.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곳에 생명나무의 열매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가 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생을 얻게하는 열매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창세기 3 22절에서 설명한다.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생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한다. 그래서 창세기 3 24절에서『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은 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은 죄를 알게해 주시는 것이며, 죄인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율법 속에 생명과일(그리스도)을 감추어 놓으셨다. 생명과실을 먹어야만 하는데, 먹지 못하게 막으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난 상태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영을 흙속에 넣으셔서 인간이 되게 하시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는지 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포기하고 율법 속에 감추어진 생명나무의 과실(그리스도)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겠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보낼 테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의를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이다.

씨는 약속의 씨로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땅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땅은 흙이다. 사람의 근본은 흙이다. 창세기 3 2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땅을 간다는 것(경작)은 씨를 뿌리기 위함이다. 사람의 마음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것으로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부활의 신앙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 열매맺는 일이다.

창세기 3 17-19절에서『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식량을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경작하여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적 생각이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영생의 열매를 모르는 것이다.『먹을 것을 먹으리니』는 영생의 먹을 것이다. 영생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땅(마음)을 갈라고 하신 것이다.

창세기 2 15절에서『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 밖의 세상에서 창조하셨다. 그래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끄셨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겠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에서 그것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나무를 위해서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경작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영생하는 과일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씨뿌리는 비유는 영생하는 과일을 얻기 위한 것이다. 영생하는 과일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밭의 비유에서 네가지 유형의 밭이 소개된다. 즉 네가지 유형의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 만 좋은 밭이다. 말씀의 씨가 마음에 떨어져서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이 좋은 밭이라는 것이다. 좋은 밭은 땅을 갈아서 씨뿌리기 좋은 상태의 밭이다.

『마음을 간다』는 것은 수없이 성경의 말씀을 상고해서 하나님나라에서 범죄한 사실과, 이 땅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마음의 밭을 경작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잘 이해하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그 말씀이 생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해 거룩한 마음의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없다. 좋은 밭으로 경작하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경작하는 것이다. 죽는 것은 탐욕의 마음이 죽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리고 희생제사를 통해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땅을 경작하는 의미다.

네가지 마음 밭에서, 좋은 밭을 제외한 나머지 밭은 세상에 마음을 두고 있는 밭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밭을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과 흑암에 갇힌 자라는 것과 생명과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좋은 밭이다. 그래서 좋은 밭에만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게 했던 탐욕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같이 죽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부활하여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자가 열매맺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밭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좋은 밭이 된다.

 

2. 등경 위의 등불

마가복음 4 21-23절『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먼저 한글 개역개정의 번역이 헬라어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잘못되었다. 다시 수정을 해보면『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상자 밑에나 침상 밑에 두려고 등잔불을 가져오느냐 등잔대 위에 두려고 가져오지 아니하느냐 감추어 둔 것 중에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은밀히 간직한 것 중에서 널리 퍼지지 아니할 것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헬라어 번역성경)

창세기 1장의 첫째날에서 일곱째 날까지 표현을 하면, , 궁창, (), 마오르, (바다), 짐승(사람), 안식으로 나누어진다. 이를 성소의 용어와 요한복음,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연결하여 적용할 수 있다.

넷째 날, 마오르는 등잔대와 같다. 요한계시록은 일곱별(일곱교회의 사자)을 의미한다. 일곱별은 복음을 전하는 자(성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현재적 부활을 믿는 별과 같은 자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대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9장은 맹인을 고쳐주신다. 절기로는 오순절과 관계된다. 요한계시록은 6-7장의 내용과 관련된다. 일곱 봉인과 인을 치는 내용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므로, 성도는 성령세례를 받고, 세상으로 나가 천국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교회의 성도가 임마누엘이 되면 교회 안에 빛이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이다. 즉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가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등잔불이 된다.

빛이  안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 빛이 되는 자가 있고, 빛이 되지 않은 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 아닌 자가  빛을 보고 모두가 빛이 되는 원리가 된다. 빛은 집안에서 먼저 비춰지고  다음에 밖으로 빛이 나가는 것이다.교회에서 임마누엘이 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비춰진다.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가 흑암에 싸여 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뉘어 진다. 이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은 것이다. 빛이  세상을 비추기 이전에 집안을 먼저 비추는 자가 되고  다음에  세상에 빛이 발산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은 창세기 1 3절에서 말하는 빛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이 세상이 흑암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시는 것이다. 원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 5절에서『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하나님이 흑암에 있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빛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도라고 말을 하면서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는 빛을 비출  있게 된다. 그러나  전에는 흑암에 있었으므로 빛을 비출  없었다. 예수님이『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빛이라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빛이 됩시다. 또는『빛이 되게 해주시고』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없는데, 『빛이 되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빛이 되었는데, 빛이 되게  달라고 기도한다.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기도인 것이다. 새생명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빛이  것이다. 

 

 

3. 자라나는 씨 비유

마가복음 426-29『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바실레이아  데우 (ἡ βασιλεα το θεο)로서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진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땅은 흙으로 된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흙의 모양을 만드시고 영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성전)이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옛성전(옛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성전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마지막 사람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와서 부활의 몸(새성전)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새성전을 얻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옛성전)이 죽고(파괴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새성전)으로 태어나는 것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 새성전이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면 그리스도가 그 성전에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그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짐을 의미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새성전이 세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성도가 부활의 열매를 계속 맺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도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땅인 사람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결된다. 로마서 4 18-22절『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처음 믿을 때,『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놀라운 결단을 하지만, 친척 롯을 데리고 나온다. 우리가 주인됨을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자기 의지대로 믿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만 주님의 명령에 분별된다.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셨다. 제물을 쪼개게 하시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 안으로 오고 가는 것을 보여주셨다. 안믿을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 때 언약을 받는다. 언약을 받지만,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낳는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안되는 것이다.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이게 99세까지다.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믿음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얻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브람이 주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었다. 아브람은 자기가 인간적으로 낳은 생명 이스마엘에게 믿음과 사랑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과 하나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사라의 태가 죽었는데 어찌 자녀를 낳으리요』라는 것이다.『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살게하소서』라고 말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예수믿으세요, 예수의 공로를 믿으세요 믿으면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 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아브람이 전쟁을 이기는 승리를 체험하고, 멜기세덱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해도 안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베드로처럼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오늘밤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말해도 베드로는 자기 확신 때문에『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믿는 자로 보여질 수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더 믿는 자였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말을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아들의 말은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라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그 분과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현재적으로 그 분과 부활로 연합하여 열매맺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도들은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겨자씨 비유

마가복음 430-32절『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했다. 이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자기 밭은 바로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들렀을 때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장면이 있다. 요한복음 4 22절에서『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자기 밭에 심은 자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자기 밭(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겨자 씨)를 심었다. 그래서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되었다. 이 공중의 나는 새들이 바로 베드로가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새들이다. 바로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이방인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는 처음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약해 보이지만,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 이후 성령의 오심으로 인하여 복음이 이방인에게 확산될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겨자씨(예수 그리스도)를 성도의 심령 속의 밭에 심어주신다. 겨자씨 비유에서 밭은 바로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하나님 나라)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331-32절에서는 하나님 나라 대신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천국은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서 심령 속의 성전(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이셨다. 성도 역시 부활의 열매가 맺혀지고, 성도가 전도를 통해서 그 부활의 열매를 나눠주므로서 확산되는 것이다. 공중의 새들은 이방인을 의미하지만, 현재적 부활이 된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에서 간질로 고생하는 자를 어떤 사람이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고쳐주었다. 제자들이『우리는 왜 고치지 못합니까』라고 물렀더니『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시면서, 20절에서『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는『날마다 이런 믿음을 가지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육정이나 혈통으로는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오직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 이런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오직 이런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땅을 기경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땅이 기경될 때 농부가 씨를 뿌려주는 것이다. 농부가 땅을 기경하고 씨를 뿌리고 싹이 나서 가꾸면 열매를 맺고 수확을 한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고 하나님 말씀의 씨를 뿌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결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된다. 씨를 뿌리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것은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으면, 성도의 심령 속에 옛성전(이 산)을 저리로 옮겨버린다. 그래서 저 산(새성전)을 저기서 여기로 옮겨버리라고 하면 옮겨지는 것이다. 이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서고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오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권능은 병을 치료하고 죄를 사해주는 권능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간질병 들린 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적 부활의 능력이 없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패역한 세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말을 했지만, 귀담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패역한 세다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인데,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 궁금하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분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동안에는 제자들이 직접 권능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기대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능력이 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마가복음 1235-37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성경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과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과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The LORD)이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의 영으로 인해, 그리스도(The Lord)를 예정하셔서 스스로 흙속에 들어가서 첫사람이 되었고, 다시 그를 잠들게하여(죽음:십자가의 예표) 남자와 여자로 분리하여, 모든 인간들에게 육의 몸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그 범죄한 천사의 영을 태어나는 인간들의 몸에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정하신 대로, 스스로 마지막 사람 아담(부활의 예표)으로 태어나, 회개하는 자들에게 영의 몸(부활:그리스도의 옷)을 주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The Lord)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오셨다. 셀렘왕 멜기세덱의 모습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는 자의 모습으로, 상수리 나무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는 자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다고 하셨다.

요한복음 8 55-59절에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예수님이 요한복음 5 39절에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대속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예수님을 의미한다. 이 분은 첫사람 아담으로 세상에 와서 죽어야 할 몸을 인간에게 주었는데, 죄의 몸을 위한 대속을 이루는 사명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을 했던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은 혈통적인 문제를 정리한다.

마태복음 22 41-45절에서도『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고 말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는 마태복음 11절에서 등장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히우)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히우는 아들(자손)이라는 의미다. 아들은 육신의 혈통으로 된 아들이 아니라, 사역을 할 수 있는 자로서 아들이라는 의미다. 당시 남자들만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성인이 된 남자를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아들은 후손이라는 개념보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서 아들인 것이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이 자녀들 중에서 주로 한 사람을 등장시킨다. 가끔 두명도 있지만 한명을 등장시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를 이어가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열네대, 열네대, 열네대를 삼등분하여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 42 세대가 된다. 42세대가 진행되는 동안 믿음의 세대가 한 사람씩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이어져 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죽음과 부활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사십일간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승천하셨다. 마태복음 2337-39절에서『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주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Lord) 라는 것이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영어성경을 살펴보면, The LORD said un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kjv) 앞의 The LORD는 보좌의 하나님이시다. 뒤의 my Lord는 부활하여 보좌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재림하신다. 신실한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진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져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마지막 날 백보좌 심판이 임할 것이다.

 

.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믿음

 

1. 베드로의 고백

마가복음 827-29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더라는 것으로 대답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갑자기 반기를 든 것이다. 즉 죽으시면 안된다는 말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 마태복음 16 22-23절에서는 좀더 상세한 항변 내용이 나온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한 순간 하나님의 일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므로, 사탄(검사)이 베드로를 기소하려고 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보호하려고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꾸짖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므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닭이 세번 울 때까지 예수를 세번 부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마태복음 26 75절에서『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찾아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임무를 맡기셨다.

요한복음 13 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대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하셨다. 『깊은데 그물을 던져라』말씀하셔서 밤새도록 물고기 한마리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게 하셨으며, 장모의 열병이 즉시 떠나가게 하셨다. 성경에서 베드로처럼 많은 기적을 경험한 자도 없었다. 베드로는『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고, 풍랑치는 바다 위를 걸었던 베드로였다.『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고백한 것도 인간적으로 보면 상당한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붙잡혀서 십자가에 섰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에 버림 당한 예수가 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세상으로 부터 버림당한 예수를 따를 수 있겠는가? 예수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환란이 오고 불이익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왕으로 세울 것을 생각했다.

회개하지 않은 자도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회개하지 않은 자가 기적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회개한 자는 기적 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내가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다. 회개하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을 원하지 않으며, 이세상에서 축복도 바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축복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

베드로는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대표성을 나타낸다.『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세례는 구원인데,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전에 마음대로 살다가 그런 생활을 개선하면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베드로의 결심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 이게 은혜와 새 언약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증거다.『기도해야 하는데, 새벽기도 가야만 하는데, 전도해야 하는데』이렇게 사로 잡혀있는 것이 율법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혀있는 것이 종교행위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루터의 당시 기독교와 많이 달라졌다.『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말할 때는 루터 당시는 목숨을 건 기독교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교회가 세상과 연합되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오직 예수만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상한 심령이 되지 않으면 회개한 자가 아닐 것이다.『그냥 예수를 믿어볼까?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지?』 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그것은 육신적 자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다.

아무리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육에 있는 자는 바뀌지 않는다. 베드로는 단 하나,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대신 죽으러 왔다』는 말이 이해되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를 왕 같은 분으로 생각하는데, 희생양으로 죽게된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삼년 동안 부활에 대해서 질문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게 육신이다.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에 들여보내도 열정탐꾼은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했고, 모든 백성들은 다 그 말을 믿고 통곡했다. 예수님이 죽고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말을 제사장들도 다 듣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기억조차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육신 아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기 전에는 모두가 육신인 것이다.

회개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지은 죄를 기억하고 모두 열거하여 아뢰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 때문에 죽은 것을 깨닫게 되는 것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의 죽으신 고통이 내 죄만큼의 고통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만이 회개다. 세상을 덜 사랑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은 애굽을 나온 것이다. 홍해바다는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광야는 내가 세상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거듭나게 하신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회개는 가짜 회개다. 회개없이 믿는다고 하는 믿음도 다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회개없는 변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없으면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 가문의 기질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잠깐만 조정될 뿐이다. 십자가에 반응하는 자는 없다. 육신은 십자가에 반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결국 육신은 회개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2. 변화산 사건

마가복음 9 1-3절에서『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당시 유대인들과 심지어 제자들은 혼란을 겪는다.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가 엘리야나 모세가 환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은 예수를 신, 또는 반신안인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만일 부활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이 보여줄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들은 부활의 장면을 보았을 때 예수를 신으로 생각할 것을 예수님은 우려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인자 곧 사람이셨다. 부활하기 전의 예수는 신도 아니고, 반신반인도 아닌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호칭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취지는 이해가 가지만 그렇게 되면 예수가 신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와 같은 개념이다.

마가복음 9 4-5절에서『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를 본 제자들은 그들을 신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잘 아는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변신하여 올라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도 얼굴에 광채를 나타낸 것을 모세오경을 통해서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초막(성전) 세개를 지어 예배하겠다는 표현이다. 이게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예수를 신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이 정의를 내려주신다. 그는 나의 아들이고 죽고 부활하기 위한 사역을 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므로 그의 말을 따르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9 6-7절『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어떤 제자들은 예수를 엘리야가 환생했는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했는데, 말라기 3장에서 선지자가 한 말을 두고 서기관이 그렇게 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마가복음 9 11-12절에서『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두고 엘리야가 먼저 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엘리야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죽고 부활하는 사역을 맡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9 13절에서『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십자가의 사역을, 그리고 세례요한은 십자가의 사역을 위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곧게 하셨다.

마태복음 3 3절『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테 에레모 τ ρή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테 에레모(τ ρήμ)는 하나님을 떠난 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세상에 던져진 자라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구불구불했다면, 세례요한이 이제 곧게 만들어서 나아가기 좋게 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말라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백성들을 돌이키겠다』고 하셨다. 이 말라기 선지자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영이 인간으로 태어난 자가 세례요한이다. 그래서 그 일을 세례요한이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 17절에서『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자식은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거스르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세례요한)이 준비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라는 말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부르짖는 요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므로 회개하여, 율법 속에서 죄인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길을 평탄케하고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비로 이 일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잘 지키면, 의인이 되는 것처럼 믿고 있는데,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 율법 속에서 자신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로 방향을 돌이켜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주실 것이다 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에 와서, 앞길을 평탄케 하는 말(회개하라)을 했지만, 유대인들의 지도자 급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깨닫지 못했다.『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예수님도 세례요한과 같이 임으로 대우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40 3절에서『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말에서 광야와 사막은 어디를 말하는가? 세례요한이 외치는 광야와 사막은 바로 이스라엘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별개하고 생각했으며, 대부분 부활을 믿지만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다. 그런데, 육체가 죽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도 보여주셨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메테모르포데 μετεμορφώθη)』”변형되사”에 대한 영어 번역은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kjv,niv)라고 되어있다. 메테모르포데(μετεμορφώθη)는 메테(되돌아가다)와 모르포데(하나님의 본체) 의 합성어이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을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부활은 모양이 바뀌는 것이다. 즉 다른 존재가 된다. 영어로 transgigure라는 말이다. Change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서서히 변화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가죽옷에서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에서 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도 역시 부활하면, 그런 상태가 된다. 천사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한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부활은 옛혼에서 새로운 영의 몸이라는 혼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옷이 희어지는 것은 이전의 옷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다.

 

3. 귀신들린 아이를 치료못하는 제자들

마가복음 9 17-20절『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마가복음에는 귀신들린 아이라는 표현이지만, 마태복음은 1715-16절에서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라고 표현되었다.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물에 넘어지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할 자를 의미하며, 불에 넘어지는 자는 옛사람()에 대해서 불에 타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마가복음의 예로 귀신들린 자는 죄인으로서 흙에 갇혀 귀신의 지배 아래 있는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7장에서 간질로 고생하는 자를 어떤 사람이 데리고 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이 고쳐주었다. 제자들이『우리는 왜 고치지 못합니까』라고 물렀더니『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시면서, 20절에서『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이유는 제자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믿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된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성도의 믿음이다. 현실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을 믿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있다 하더라도, 현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는 극히 소수일 것이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는 믿음이다. 성도가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으면, 성도의 심령 속에 옛성전(이 산)을 저리로 옮겨버린다.

그래서 저 산(새성전)을 저기서 여기로 옮겨버리라고 하면 옮겨지는 것이다. 이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서고 그리스도가 심령 속으로 재림해 들어오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권능은 병을 치료하고 죄를 사해주고 귀신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권능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귀신들리고 간질병 들린 자를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적 부활의 능력이 없는 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패역한 세대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말을 했지만, 귀담아 듣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패역한 세다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인데, 어떻게 부활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가 궁금하겠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분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동안에는 제자들이 직접 권능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기대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능력이 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4. 영적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마가복음 9 37절『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파이니온 παιδων)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여기에서 대조법으로 보면,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에서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려면 예수님의 제자가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어린아이가 있다.

어린아이는 누구를 말하는가? 먼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의 귀절을 보면,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원리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931절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해주셨다.『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따라서 어린아이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 당시 제자들과 같은 영적 어린아이를 의미한다. 파이니온(παιδων)은 표면적으로는 소년, 소녀를 의미하지만, 이면적으로는 성숙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말했지만, 제자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기에서는 제자들이 영적 어린아이가 된다.

제자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는데, 누가 크냐 라는 말로 다투었다. 마가복음 935절에서『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오늘날 영적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보다 세상에 관심을 더 갖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만, 예수님의 큰 권능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권세를 누려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기복신앙을 가진 자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내 이름으로는 내 이름 안에서 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인데, 영적 어린아이 같은 자에게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의 연합과 부활의 의미를 받아드리도록 잘 가르쳐 주라는 것이다. 이게 복음의 목적이다.

마가복음 942절에서『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작은 자는 영적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가르쳐 주어야 함에도, 인본주의 율법주의로 잘못된 것을 그들에게 심어주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되는 것이다.

성도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그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성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세례로 표현한다. 물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이고,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켜 주신다. 이게 성령세례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죽음이며, 부활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현재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현재적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성도라면, 교회의 형제들을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7절에서『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실족하게 하는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도 못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심지어는 성경 말씀을 왜곡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믿게 한다. 누가복음 937절의 어린아이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인데, 나이가 적은 어린아이로 말하므로, 부모가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잘 양육해야 한다거나,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므로, 자기를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던지,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므로, 성도 역시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말로 연결시킨다. 그들은 성경 말씀의 핵심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947절에서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눈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실족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실족하게 된다. 그래서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게헨나는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를 태우는 불(심판)을 상징한다. 심지어는 마가복음 948-49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7 31-32절에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힌놈의 골짜기에서 게헨나가 나타났다.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밖 남동쪽의 쓰레기 장이었다. 동물의 사체를 태우는 것이다. 사체에서 구더기가 나온다. 그런데, 힌놈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몰렉에게 자녀를 태워 제사를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성전의 타락을 의미한다. 오늘날을 비유하자면 교회의 타락을 의미한다. 인본주의 율법주의가 만연한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서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에서 자유를 주고자 하지만, 신도들은 이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게헨나는 쓰레기를 태우는 의미가 있지만, (비진리)의 불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태우거나, 심지어 신도들에게 세상의 복을 빌어주기 위해, 과거 이스라엘이 몰렉제사를 한 것 같이, 하나님의 아들도 계속 제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신도 자신에게 떨어진 불은 연단이 되지만, 타인을 비진리의 불로 태울 때는 그야말로 지옥불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불에 사는 것이다.

 

5. 누가크냐

마가복음 10 32-35절에서『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세번째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통제하시며, 열두해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낫게 하시며, 죽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고, 귀신을 쫒아내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며, 바다 위를 걸으며, 병자를 낫게 하는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죽고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세번이나 하므로 제자들은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러나 언젠가 세상을 통치할 때 한 자리를 차지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가복음 9-10장의 내용을 근거로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맹인, 귀신들린 자, 우상숭배자, 어린아이, 이혼한 남자나 여자, 재물이 많은 부자, 혈육에 얽매여 있는 자 등으로 비유했다. 맹인은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 귀신들린 자는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자, 우상숭배자는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믿거나, 예수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 어린아이는 하늘 나라에서 누가 크냐 라는 생각을 가진 자,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천하를 호령할 때 자신이 그 분의 우편에 좌편에 앉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인다. 이혼한 남자나 여자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의미를 모르는 영적 간음자, 재물이 많은 부자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자신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간다고 믿는 자, 혈육에 얽매여 있는 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육적 자아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는 자)로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036-40절에서『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부자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셔서 천년 왕국이 이루어질 때, 자신들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환란을 피해 휴거도 은근히 바라고, 자신이 살아 생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죽어서 부활하여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부활하면, 20대의 얼굴로 부활하겠지 라면서 말이다.

오늘날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부활과 재림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다. 부활과 재림을 언젠가 이루어질 장래의 이야기로 받기 때문이다. 현재적 부활과 재림을 말하면 대부분 이단으로 생각한다.

신도들이 생각하는 부활에 대해서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두가지로 표현되었다. 살아나셨고 (헬라어 에게이로)부활(헬라어 아나스타시스, 또는 텐 에게르신)이다.

첫째, 『살아나다라』는 표현은 헬라어 에게이로(영어로는 rise)로서, 마태복음에는 16 21, 286, 마가복음 166, 누가복음 247, 요한복음 219, 로마서 64, 디모데후서 28, 베드로전서 121절 등에서 나타난다. 살아나다 라는 헬라어 에게이로가 부활로 잘못 번역된 것이 있었다.

마태복음 2753절『예수의 부활(에게르신)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부활이라고 표현된 헬라어는 텐 에게르신ν γερσιν)으로서 영어 성경에도 resurrection(niv,kjv)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서 부활은 문법적으로 명사이다. 즉 어떤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에게르신은 일어나다 살아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에게르신(명사)과 에게이로(동사)는 같은 의미로서 한글개역 개정의 부활이라는 번역은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부활보다 살아남(명사) 이라는 용어가 맞다. 이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예수의 살아나심(에게르신)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로 되어야 한다.

둘째, 부활은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영어로는 resurrection)로서 마태복음 2230, 요한복음 1125절에서 사용되었으며, 헬라어의 아나스타시스를 한글 개역개정에서,『살리다』라는 것으로 번역한 사례도 두건이나 있었다.

요한복음 640(한글 개역개정은 살린다 라는 표현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ναστσω) 하시니라』수정하면, 내가 이를 부활시키리라 하시니라』명사적인 용법의 아나스타시스의 동사 용법이다.

사도행전 2623 (한글 개역개정은 살아난다 라는 표현으로 잘못 번역되었다)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아나스타세오스 ναστσεως)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수정하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통한 첫 사람이 되사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보이시리라 하는 것이니이다 하니라. 다시 살아나사 라는 표현의 아나스타세오스(ναστσεως)는 영어 성경에는 to rise(niv), shoud rise(kjv)으로 표현되었다. 부활은 문법적으로 명사이다. 즉 어떤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한글 개역개정은 동사 용법으로 사용되었고 영어 성경도 동사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셋째, 이외에도 부활과 의미가 같은『하늘로부터 태어나다』라는 표현의 겐네데(γεννηθ)는 영어 성경에는 be born(niv, kjv)으로 표현되었다. 현재시제이다. 요한복음 3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교회 사람들이 거듭난다 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바로 헬라어 겐네데 라는 말이다. 겐네데는 거듭나다 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난다는 표현이다. 이 말은 내용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표현에서 물은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고 하늘로부터 태어나므로 다시 태어난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겐네데)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남(에게이로)은 의미상 같은 개념인 것이다.

베드로전서 13(한글 개역개정은 부활로 번역되었으나, 영어 성경은 일으키다:raise up으로 번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아나겐네사스)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부활 이라는 표현의 아나스타세오스(ἀναστάσεως)는 영어 성경에는 raised(niv), was raised(kjv)으로 표현되었다. niv 는 동사 과거로, kjv 는 동사 과거 수동형으로 사용되었다.

아나겐네사스 (ἀναγεννήσας)는 거듭나게 하사(하늘로부터 태어나게 하사)이다. 부활하심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말미암아는 헬라어 디(δι’)로서 ~을 통하여 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활을 거듭난 상태로 표현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123절『너희가 거듭난(아나게겐네메노이)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거듭난 이라는 표현의 아나게겐네메노이(ἀναγεγεννημένοι)는 영어 성경에는 have been born again(niv), being born again(kjv)으로 표현되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너희가 하늘로부터 태어난 것은 ……』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부활이라는 표현의 아나스타세오스, 아나스타신 등은 명사 용법으로서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의 모습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는 것이다. 아나스타신이라는 헬라어를 부활하다 라고 번역하여 동사적으로 사용한다면 의미상 맞다.

죽은 자로부터 일어난다 또는 다시 살아난다 라는 표현(에게로, 에게르데나이 등)은 육의 몸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다는 의미로서 동사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이 말의 의미는 바로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는 겐네데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다시 살아나다, 일어나다, 거듭나다 라는 표현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말 거듭나다 라는 표현은 하늘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말이 정확한 번역이 된다.

결론적으로 부활하다, 죽은 자로부터 일어난다는 말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개념이 아니라, 이전의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부터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잘 설명해 준 것이 로마서 6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현재적 부활과 예수님의 재림)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 성도 역시 현재적으로 부활한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부활한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들어오신다. 현재적 부활과 재림의 모습을 성경에서 표현한 것들이 여러 군데 있다. 그 중 세군데의 예를 보면

데살로니가전서 415-18절에서『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페릴레이포메노이)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자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역을 하다가 죽은 자를 의미한다. 페릴레이포메노이는 죽어있던 영을 살려 파루시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자들이다. 파루시안을 강림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파루시안(임재)은 주님을 통해서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림하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죽었던 자들이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가고, 그 다음에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4 15절에서 강림으로 번역된 파루시안(παρουσαν 임재) 416절의 강림인 카타베세타이(재림)는 다른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그리스도 이전의 믿음의 선진들이 먼저 일어나고, 다음에 부활한 성도들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래서 파루시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들어오시는 것이 카타베세타이이고,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 속에 임재(파루시안)하시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 51-52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코이메데소메다)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호 네크로이)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육적인 것(옛사람)이 죽고, 영의 몸으로 변화되어,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파루시안(παρουσαν 임재)하게 된다. 영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변화라는 것은 육적 몸인 혼이 갑자기 영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육(옛사람)은 죽고, 영의 몸(새사람)으로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의 몸이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코이메데소메다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호 네크로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들이다. 여기에서 죽은 자의 부활과 산자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영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로, 영적으로 산자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간다.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자 중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믿음의 선진들은 생명의 부활로, 그렇지 못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가게 된다. 이 부활은 마지막 심판 때 일어난다.

그러나 살아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 부활로 나타난다. 현재적 부활은 육적 몸이 죽고,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심령 속에 부활된 영의 몸(성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들어오시는 것이다. 영의 몸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544-45절에서 언급된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비록 성도가 현재적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 할지라도 살아있을 동안에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로 인해서 영의 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성도 역시 육적으로 마지막 때를 만나면, 부모로부터 받은 육은 사라지고, 영의 몸으로 홀연히 변화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바울은 신도들을 이 말로 위로와 격려했던 것이다.

베드로후서 310-12절에서,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후 우라노이)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파렐류손타이)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주의 날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주께서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오는 날이 어떤 사람은 빨리 어떤 사람은 늦게 찾아오신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늘로 부터나지 않으면(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다녀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난 자에게 들어오는 순간, 새창조가 일어난다.

『후 우라노이』는 심령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파렐류손타이는 파라(옆에서) 류손타이(오다)의 합성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것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번역했는데, 아마도 주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늘이 풀어지는 것은 잘못 번역된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는 것이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은 육적 몸(옛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6. 나귀타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111-6절에서『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를 자주 들르셨으므로 그 지역의 지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주변에 누가 나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이 그 지역에 도착해서 주변을 다니셨을 것이다. 베다니에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문둥병 환자 시몬이 살고 있던 마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제자 둘에게 그런 지시를 한 것이다.

나귀를 타는 예수님은 많은 의미를 가지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나귀는 부정한 동물로서 제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출애굽기 1313절에서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라고 말한다. 앞부분(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을 히브리어로 보면,

וְכָל־פֶּ֤טֶר חֲמֹר֙ תִּפְדֶּ֣ה בְשֶׂ֔ה 

『웨칼(모든) 페테르(첫태생) 하모르(나귀의) 팁데흐(너는 대속할 것이라) 브세흐(양으로)』나귀의 첫태생은 목을 꺽어 죽인다. 그런데, 나귀는 부정한 동물이므로 제물로 사용되지 않지만,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양을 대신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출애굽 당시에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을 구하기 쉽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귀 첫새끼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귀새끼의 주인은 어차피 죽여야 하는 동물인데,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다.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사람이 손을 대거나 타거나 해서는 안되었다. 초태생이 태어나면 칠일 동안은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이 되면 구별하게 된다. 그래서 목을 꺽거나, 제물로 바쳐질 때까지는 매여있게 된다. 출애굽기 1312절에서『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초태생인 나귀새끼를 타는 예수님의 모습은 두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초태생(장자)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죽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모든 세상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준다. 실제 출애굽 전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를 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외한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죽은 것이다. 희생 양이 대신 죽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귀를 탄 예수님은 죄인(장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둘째, 나귀새끼는 어린양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한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18=10절에서『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장면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해도 누가 크냐 라고 논쟁한 제자들의 모습과 닮아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유대인들은 세상을 뒤엎을 메시야가 왔으므로 다윗을 언급하며,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상태가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의 상태임을 비유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셨다.

마가복음 1115-17절에서『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기도하는 것인데, 유대 지도자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성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이제 돌성전 대신에 다른 성전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19-21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다른 성전을 주는데, 이전의 돌성전은 다 무너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돌성전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죽어야 할 육체를 의미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성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돌성전)는 첫사람 아담을 예표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하늘로부터 오는 성전)는 마지막 사람 아담을 상징한다. 따라서 돌성전(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같이, A.D. 70년 경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마가복음 131-2절에서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성전은 교회의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전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이 모일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이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을 하면 여전히 그들은 돌성전에 머물고 있으며, 유대 율법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16-17절에서『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은 성전이 세워지지 않은 것이다. 성령세례는 곧 부활을 의미한다. 성령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다. 로마서 6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오늘날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자는 여전히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이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고,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도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게 율법 속에 있는 자들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유대 땅에 태어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당시 성전 안에서 물건을 매매하듯이, 오늘날 교회를 통하여 사업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을 앞세워 장사하는 격이다. 교회를 주식회사처럼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지도자들이 권력과 타협하고, 정치한 것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유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은 많은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없고,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 더 중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타락한 것은 아닐지라도, 오늘날 교회가 율법주의 인본주의에 물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7. 유다의 배반

유대의 배반

 

마가복음 14 10-11『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가롯유다가 제사장으로부터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았다. 왜 예수님의 제자인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는가?

가롯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되었지만,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향해 주 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 예수님을 랍비 라고 부르며 선생 이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2 5-6절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는 탐욕에 사로 잡혀서 예수님 뿐만 아니라 동료 제자들의 신뢰를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다는 단지 예수님에게 많은 추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단체를 위해 거둬지는 모금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유다가 그 그룹을 위한 돈 가방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관심이 돈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유다는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가 로마의 식민지배를 전복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다스릴 권력을 행사할 지위를 취할 것으로 믿었다. 유다는 새로운 지배 정치 세력으로 부상할 그분과의 연관을 통하여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수도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혁명 이후 자신이 지배 엘리트 중 한 사람이 될 것을 기대했다. 유다가 배반할 무렵에 예수께서는 로마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죽을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래서 유다는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가 로마를 전복시키지 않는다면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결코 아니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가롯유다가 생각한 마음은 결국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모두가 다 가롯유다와 같이 될 수 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가룟유다 간에 은 30 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롯유다에게 은 30을 다시 주면서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면서 네가 당하라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므로,  유다가 다시 그 돈을 받아서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메어 죽음을 택것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불의의 삯을 받고 예수를 파는 자가 결국은 사망으로 가게 된다는 교훈이 되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를 파는 자는 사탄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지 않는 삯꾼 목자들이 다 그러하다. 예수님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셨는데, 율법으로 다시 가두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의 삯이라는 말은 일만악인 돈을 신자로 부터 받아내는 삯꾼목자인데, 이들이 받을 죄에 대하여 가룟유다를 예표로 하나님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앞에 십일조나 헌금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우리가 하나님앞에 드리는 예물이라는 말은 생명체가 없는 그 어떠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로서 다시 살아난 영을 드리는 것이다. 여전히 율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엇인가 물질을 바쳐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믿는 자들이 십일조나 헌금을 하는 것은 교회에서 강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삯꾼들은 그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리는 형세다. 교회의 운영상 예산이 필요하지만, 성경적 근거를 대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가룟유다의 잘못된 행동만을 본다면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역사공부 하는 것이다. 가롯유다를 통해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불의의 삯으로 무죄한 피를 팔고 돈받은 것에 대하여 모든 죄를 가룟유다에게 돌리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재물을 받쳐야 한다는 율법적 근거를 대면서 신도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가 강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가롯유다에게 하는 말이면서,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있는 목자나 성도들에게 하는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거듭나,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면서도, 결국 다시 율법적으로 돌아가는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삯꾼들은 가롯유다처럼, 그 책임을 신도들에게 돌리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유다는 은 30 받은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그 돈을 성소에 던져넣고 나온다. 가룟유다는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항상 헌금을 받아왔던 자들 이었기 때문에 은 30  다시 성소에다 갖다 던져 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세상의 물질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거듭남을 원하시는 것이다.  가룟유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은 돈 때문인것이다. 돈이라는 것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오만과 불손종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일부 교회에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해서 율법인 방법으로 헌금을 하도록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값이라』 가룟유다가 쓸모없다고 던져버린 은 30을 다시 주우며 『이것은 피값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들하고는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도록 한 돈을 일컬어서 피값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은 30 과 예수님과 동격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30은 여자를 의미한다. 오늘날 진리 말씀이 없는 교회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여전히 율법에 빠져 있는 교회들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소경들이다.

요한복음 9 41 절에서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이사야 1 12절에서『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유형적인 건물로 지어진 교회를 왔다갔다 하면서 마당만 밟고 다니는 것을 하나님을 믿고 신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다.

가룟유다가 성소에 은 30을 다시 갖다놓고 떠나버린 후에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이 돈에 대하여 의논했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로 은 30성전고 (지금으로 말하면 성소안에 있는 금고) 에 넣어두는것이 옳지 않다고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말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는 제사장들에게는 이단인 것이다. 성소는 하나님에게 제물을 바치며 의식을 행하는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단에 속하는 예수를 판돈을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넣어두는 것은 옳지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깨달아 알지못하고 있던 소경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돈을 가지고 무슨 이유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 이사야서 64 8 절에서『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토기장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사람을 손으로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은 30을 가지고 하나님의 밭을 샀다는 말인가?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은 거짓목자요 삯꾼목자들이다. 하나님의 밭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샀다는 말이다. 육적으로 보면 흙으로 된 밭을 산 것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들은 이 돈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산 것이다.

삯꾼들은 영적으로 성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게 한다는 것이다.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은 30을 가지고 하나님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이리들과 같은 자들이 것이다. 오늘날도 삯꾼 목자들은 성도들을 현혹시켜,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있다.

 

8. 십자가에서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이 다 도망하다

마가복음 14 71~72절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요한복음 13 36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금은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나를 따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3년 동안 주님을 따른 베드로였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직장과 가족을 떠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믿음은 커졌지만 지금은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주님이 폭풍우의 물위에 서 계실 때에도 물위로 따라간 사람은 베드로였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는 이제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인간의 결정을 통해 달성되지 않는다. 이는 내부 변화를 통해 일으나는 것이다. 내부 변화는 육적자아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죽으러 왔으니 대속물로 죽었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기적을 보고 말씀을 배우면 믿음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다. 예수께서 “지금은 너희가 나를 따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내가 왜 지금은 따라올 수 없느냐? 나는 당신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13:37)라고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생각이다. 베드로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너희는 이제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때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니요, 나는 온 목숨을 다하여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있는가?

푸쉬켄은 혼이다. 혼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육체와 영이 만나 생명체가 된다. 창세기 2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되니라』네페쉬하야는 혼(살아있는 생명체)을 뜻한다.

신자는 육과 영과 혼을 이해해야 한다. 육체는 육체로부터 형성된 육적인 자아를 갖고 있다. 육적 본성과 혈연관계 등을 포함해 일곱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없는 자에게는 성령이 없으므로 영이 죽은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혼은 죽음과 영생에 반응하는 옷과 같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혼은 슬퍼진다. 이것이 혼이 반응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때 마음은 또한 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의미에서 신과 같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옷과 같은 혼이 불타서 죽고, 하늘에서 오는 새혼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야고보서 5 20절에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고 했다. 베드로전서 1 9절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soul)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다. 영혼이라 번역된 것은 혼이다. 구원과 혼은 연결되어 있다. 오해하면 혼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하고 새롭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혼에는 육적 혼과 영적 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혼은 영과 흙이 결합하여 나온 것이므로 반드시 죽어야 될 것이다. 영적인 혼은 하늘에서 내려온 혼(새사람)을 말하며, 영의 몸, 즉 그리스도의 옷으로도 표현된다.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옷과 같고, 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신령한 옷과 같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옛사람(옛혼)은 십자가와 연합되고, 새사람(새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된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혼은 부활한 몸을 의미한다. 부활한 몸은 육체가 아니라 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영이 살아나고 영과 혼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주제는 육신에서 나온 혼이다. 이는 부모에게서 육신을 받았기 때문이고, 하늘에서 혼을 받아야 하는데, 성경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에서는 옛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고, 성령을 통하여 새사람(성령세례:부활)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으로 나지 아니한 자는 베드로와 같이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육을 가지고 있으며, 육적 자아는 일곱의 형태로나타난다. 그러므로 다시 하늘에서 태어났더라도 육적자아와 싸워야 한다. 넘어지고 때로는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신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의 법을 따른다. 로마서 8 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다.

성경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역시 주님을 3년 동안 따르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신자들의 옛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사람들이 믿고 있지만, 성경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믿음을 지적하고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믿음은 거듭난 자의 믿음이 아니다. 신앙의 핵심은 주체가 누구인가이다. 영적 자아인가, 육적 자아인가? 영적 자아는 성령께서 주신 마음이고, 육적 자아는 탐욕이 스며든 자아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의 육적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육체적 자아는 육체의 본성, 혈연,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 자기의 의, 지배욕을 뜻한다.

많은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한 구속의 죽으심을 믿고 있지만,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으로 믿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돌이켜 회개하는 자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다. 베드로가 주님께 “내가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해도 그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9. 청년이 벗은 몸으로 도망하다

마가복음 1451-52『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신도나)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κα νεανσκος τις συνηκολοθει ατ περιβεβλημνος σινδνα π γυμνο, κα κρατοσιν ατν

청년의 헬라어는 네아니스코스(νεανσκος)로서 새로운, 신선한 이라는 네오(영어의 new)에서 어근을 찾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제자들이 다 도망간 후에 일어난 일을 마가가 기록하고 있다. 이 상황은 마치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상시킨다. 하와가 하나님께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므로,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라고 표현되는데,

에덴동산의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천사의 옷을 벗기고 흑암에 갇혀버린 이야기다.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한 사건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청년은 표면적으로는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추측을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벌거벗음을 당하는 자, 예수님을 배반하여 도망가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청년은 베 홑이불(신도나 σινδνα)을 걸쳤다고 한다. 신도나는 베옷의 일종이다. 요한계시록 113절에서는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굵은 베옷은 거친(염소털이나 낙타 털로 만든 것) 베옷이다. 세례요한과 엘리야가 연상된다. 요나 36절에서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회개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121절에서『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예루살렘이 망하게 되었으므로, 세례요한이 회개를 선포했던 것이다. 두 증인은 교회를 회복하는 일과 관계가 깊다.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인 것이다.

베옷을 입어야 하는데, 베옷을 벗고 도망한다는 말은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청년은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은 아니지만, 예수를 따르는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 있는 예수를 다 버리고 도망가는 자라는 것이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육이 반응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됨을 말해준다.

요한복음 1336-38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설교가 나온다. 14 1절에서『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이렇게 시작되는 설교가 아주 길다. 계속하여 15 1-2절에서는『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그리고 15 26-27절에서는 성령에 대해서 설교를 하신다.『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이런 설교는 16장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드디어 16 30절에서유대인들은『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들은 예수를 찾아온 유대인들이다. 14-16장의 긴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16 31-32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여기서『믿는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믿는다고? 반문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꾸짖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건, 여기에 연합되기 전에는 누구나 아담과 하와가 가진 생명과 같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숲에 숨는 생명이다. 선악과를 먹을 수 밖에 없는 생명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생명이다.

삼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리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배워도 옛생명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사람들도 십자가와 연합되지 않으면 이 상태가 된다. 그런데 십자가와 연합되지 않으면서 성령체험,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역사를 구하고 있다. 그게 바로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도망갔던 한 청년은 베드로처럼 후회스럽고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들에게 찾아오시고, 그 외도 많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다. 한 청년도 여기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도망간 청년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 새로운 청년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부어주셨다. 청년도 성령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을 떠난 자라 할지라도 (베옷을 입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옷(의의 옷)으로 입혀주실 것이다. 진짜 복음은 모든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며,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함을 전하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믿는 자는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일이다. 세상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연합되는 것이다.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은 자는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현재적 부활의 영광을 입을 것이다. 도망간 청년은 하나님께 새로운 청년으로 돌아올 것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아들이신가

 

1. 바람을 잔잔하게 하심

마가복음 439-40절『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창조주였으나,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받고, 자연을 통제하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야만 한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큰 놀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람 때문이다. 바람은 성령을 의미한다. 바람 때문에 파도가 일어났다. 그래서 큰 파도가 배를 덮치게 되었다. 배 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었다. 배는 방주다. 방주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있다. 바다는 율법을 나타낸다.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났다는 말은 율법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사람들이 파도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깨우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여기서『어찌하여』라는 말은『어떤 것들을』이라는 말이다. 비록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율법 속에서 지내왔던 것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마음이 그들을 두렵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여기서『꾸짖다』라는 말은『에피티마오』라는 말인데, 전치사 에피(~)와 동사 티마오(가격을 정하다, 비난하다)가 합성된 말이다. 스가랴 11 10-13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율법)을 폐하기 위해 은총(새언약:그리스도)이라는 막대기를 잘라서, 언약을 폐했는데, 청중(가련한 양들)이 듣고 좋게여겨서 값( 30)을 쳐주었다. 이 때 값을 쳐준다는 말이『티마오』라는 단어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은 30에 제사장에게 팔았다. 여기에서『에피티마오』라는 말은 청중이 은 30에 값을 매긴 바로 그 인자(구세주)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구세주가 바람과 바다에 드러났다는 것을 말해주신다. 예수님이 오셨으므로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1425-32절『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베드로(유대인)가 예수님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그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율법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결국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베드로를 발견하게 된다. 율법을 다시 바라보므로서 율법 속에서 두려워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면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데,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베드로가 세번 부인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십자가에서 죽는 에수를 바라보지 않고, 예수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결과가 된다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구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였으며,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그런 율법주의적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그 날 오병이어의 떡을 먹었다. 그리고 물 위에 주님이 서 있는 것을 보고,『주여 만일 주님이라면 나를 명령하여 오라고 하소서』라고 말했다.『주여』라고 하지만『만일 주님이라면』이라고 조건을 달았다. 믿음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예수님이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시고『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믿음은 에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믿음이 되어야만 한다.

이 말씀과『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추구한 것은 기적의 예수였다. 그리고 병을 치유받고자 하는 자의 간절한 마음도 치유다. 구원받지 못하는 자는 기적과 같은 믿음의 결과 만을 추구한다. 오직 천국가는 것만을 추구한다. 예수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가 방법이 된다. 예수가 목적이 되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지만, 예수가 방법이 되는 사람은 예수의 죽으심을 의지하여 구원받으려고 만 한다.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을 붙잡는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되는 자가 된다.

 

2.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

마가복음 6 41-44절『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열두해 혈루병으로 고통을 받던 여인이 병에서 벗어나며, 바람을 잔잔하게 하시고, 손마른 자, 중풍병자, 나병환자를 고치시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가르치다가 저녁이 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날이 저무는데, 저들에게 뭣이라도 먹게 해야되지 않느냐면서 여쭐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 중 하나(빌립)가『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응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6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신 분이었는데, 빌립은 인간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백 데나리온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 믿음이 자신과 하나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곳에 왔던 사람들에게 인식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저 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표면적인 사건으로서 제자들의 믿음 약한 것과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끝나면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638절에서『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그런데, 요한복음 69절에서는『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이와 보리떡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이는 율법에 갇혀 있어서, 천국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를 상징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개는 모세오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법에 갇혀있으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말이다. 물고기 두마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온 첫사람 아담, 그리고 율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할 마지막 사람 예수님이신 것이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는 율법이라는 아이로부터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께로 넘어오게 된다. 이 말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복음이 되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죄인이 대속의 어린양의 죽음으로 죄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인들은 죄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게 약속의 씨에 대한 열매맺는 것이다. 씨로 있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지만, 씨가 죽으면(십자가의 죽음) 생명의 열매(부활)를 맺는 것이다.

아이로부터 받은 오병이어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복으로 내려온다. 죽어야 할 육을 일시적으로 살리는 떡 대신에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떡(부활)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43-4절에서『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돌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의미한다. 율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의 말씀인양 찾는 것이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율법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율법에 따른 말씀)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복음)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율법에 따른 말씀은 결국 죄인은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복음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다름아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이다.

아이로부터 받은 오병이어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의 복(생명의 부활)로 다가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마가복음 643-44절에서『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떡을 먹은 남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를 상징한다. 천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천년왕국이라고 했을 때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5)는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이루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그 분을 따랐으나,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또한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거두었다고 한다. 계속 열두 제자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져야 함을 말해준다. 열두 제자이지만, 이는 상징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41-4절에서『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에피스튜산 πστευσαν)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에피스튜산은 자기가 믿는 믿음(believe)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belive in)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기가 믿는 믿음(believe)이다. 예수님께서 병을 치료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등의 기적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하고, 베드로가 말하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자기가 믿는 믿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완전히 의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다음의 믿음(believe in)은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성령세례)이다. 갈라디아서 322-23절에서『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πίστεως ησο Χριστοῦ) 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하늘로부터 믿음이 오기 전에는 모두가 율법 아래 갇혀있는 자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은 바로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라는 말이다. 이것을 우리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번역했는데, 마치 신도가 믿는 그런 믿음으로 오인하게 잘못 번역된 것이다. 제대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을 하실 때,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성부께서 부활시켜준다는 믿음이다. 이 부활은 죽었던 육체가 다시 살아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영생으로 태어나는 새로운 몸(:그리스도의 옷)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이미 성도는 육으로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성령의 능력(성령세례)으로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있는 믿음이 된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믿음인지 잘 검증해보아야 할 것이다.

 

3. 사천명을 먹이심

마가복음 86-9절『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오병이어에서는 아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제자가 받아서, 예수님께 전했는데, 이번에는 제자가 가지고 있던 떡 일곱과 물고기 두마리를 예수님께 전했다. 떡 다섯개는 모세오경(율법)을 상징하지만,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일곱개의 떡은 율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생명의 말씀이 된다. 물고기 두마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 온 첫사람 아담, 그리고 율법에 따라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할 마지막 사람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축사를 하셨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떡이 하늘의 복(생명의 부활)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메시지다. 예수님은 갈리리, 데가볼리, 디베랴 지역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전하셨다.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떡을 먹은 남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를 상징한다. 천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천년왕국이라고 했을 때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4)는 광야를 나타낸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열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백성들이 다 밤새도록 통곡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래서 그들은 사십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이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과 출애굽 당시 19세 이하의 아이들만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다.

하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호응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버리는 것이다. 일곱 광주리는 생명의 말씀을 주어야 할 대상이 가득하다는 의미다. 오늘날, 교회에서 부활을 전해도, 예수님의 부활만 믿지, 신자들의 현재적 부활을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이다. 미래에 육체가 죽어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적 부활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오병이어의 바구니는 적은 것을 담을 수 있는 물건이지만, 칠병이어의 광주리는 크고 재질도 중요하다. 광주리는 갈대를 엮어서 만들었다. 갈대는 아기 모세를 담은 갈대상자를 연상한다. 그러나 여기서 갈대는 애굽을 상징한다. 에스겔 29 6절에서『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애굽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갈대지팡이라는 의미다. 열왕기하 18 21절에서도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즉 갈대로 엮어서 만든 광주리는 세상을 상징한다.

일곱 광주리에 남아있는 떡은 이제 출애굽 해야 할 수준의 신앙인을 나타낸다. 그들은 출애굽도 하지 않고, 사탄의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태복음 1319절 씨뿌리는 비유에서『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가에 뿌려진 자요』죄인이 말씀을 깨달아야 하는데, 말씀을 깨닫지 못하므로, 사탄이 가져가는 것이다. 길가에 뿌려진 자의 마음의 상태는 굳어있는 상태이다.

『땅(마음 밭)을 간다』는 것은 수없이 성경의 말씀을 상고해서 하나님나라에서 범죄한 사실과, 이 땅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바로 마음의 밭을 경작한 자가 되는 것이다. 좋은 밭으로 경작하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경작하는 것이다. 죽는 것은 탐욕의 마음이 죽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율법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리고 희생제사를 통해서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땅을 경작하는 의미다.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집(성전:그리스도)으로 가지 못하고 예수를 떠나 다 흩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 구원이 된다. 예수님이 흩어 보내시는 것은 그들은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4. 죽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킴

마가복음 537-40『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예수님의 제자 중 세명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예수님이 부활에 대한 개념을 심어주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에서도 세명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되었다. 회당장이 바닷가에 계신 예수님께 와서 딸을 살려달라고 청을 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허락을 하고 오시는데 중간에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만나게 되고 시간이 지체가 되어 야이로의 딸이 죽게되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가시니까 이미 딸이 죽어서 울고 있는데,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방에 들어가셔서『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살았다. 아이가 죽으니 영이 나갔다. 인간의 육체에 들어온 영은 갇힌 상태이다. 그런데 육체에서 나온 것은 놓인 상태를 말한다. 인간의 육체 속에 영이 들어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영을 가두신 것이다. 흑암에 갇혔다든가 옥에 갇혔다든가 포로가 되었다든가 이런 말과 같은 의미인 것이며,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육체 안에 갇혀있다는 말은 그 영이 죽었다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곳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다. 생령은 영적 존재가 아니라 혼적 존재를 말한다. 흙이라는 물체가 생기로 인하여 숨을 쉬고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아담의 상태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인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지은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어서 생명체가 될 때 그 생기는 영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그 영을 넣어 줄 때는 이미 그 영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영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즉 육신이 죽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일으킨 기적을 표적이라고 한다. 기적에서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내적인 것이 있는 것이다. 회당장은 율법을 상징한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모여 말씀을 가르치고 배운다. 회당장의 딸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살려주시려고 한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살려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장면을 보면, 영이 떠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다.『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영을 살리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아이와 하나가 되고, 다시 예수님이 살아난 아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자는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살아날 것이라는 예표인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러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육적 몸이 장사지내지 않으면, 영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야이로의 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방인(혈루병 걸린 여자)이 야이로의 딸보다 먼저 고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을 살리고 싶어한다. 그 전제조건은 영이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것은『인간들의 영은 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영들을 살리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영생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의 의도 즉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영을 살리기 위해서 왔다』라는 것은『영은 다 죽어있다』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하기를『의원은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가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가 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라고 하셨다. 죄인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는 영생을 얻게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든가 또는 영을 살리러 왔다든가 이런 말씀을 하실 때는『너희는 죄인이라든가, 너희는 죽은 영이라』던가 하는 전제조건이 있는 것이다. 즉 선포하시는 것이다.

 

5. 영과 혼과 육에 대한 이야기

마가복음 14 32-35『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프로슠소마이)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카디사테)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프쉬케)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프로슠소마이(προσεξωμαι)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다. 지성소 기도에 해당된다. 카디사테(καθσατε)는 예수님은 기도하고 제자들은 앉아있는 모습이지만,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기도하라는 말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혼이 심히 고민되고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마가복음 14 41절에서『마음(프뉴마)에는 원이로되 육신(사륵스)이 약하도다 하시고』 프뉴마(spirit)는 영(성령)이다. 그래서 영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며, 소마(육체)로부터 온 사륵스(육신)는 육의 마음(육적자아: 일곱 가지의 유형)이며, 프쉬케(soul)는 혼이다. 혼은 영과 육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생명체(옷으로 표현)라는 의미다.

그래서 혼의 마음은 생명체가 갖는 마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영생(구도의 길)을 생각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옛혼(옛사람)에 대한 죽음이다. 그래서 새혼(새사람)으로 부활한다. 새혼을 그리스도의 옷이라고도 한다. 베드로전서 1 9절에서는 혼의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한다.믿음의 결국 곧 영혼(프슈케) 구원을 받음이라』영혼이라 번역되었는데, 혼이다.

예수님의 사례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은 세가지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영(성령)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나가는 마음이다. 둘째, (사륵스)의 마음이다. 첫사람 아담의 흔적인 육적 자아(일곱가지 육적 속성)이다. 그리고 셋째, 혼의 마음이다. 이는 육과 영이 결합되므로서 나타나는 마음이다. 혼은 옷과 같은 것으로서 영이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를 입고 있을 때는 불완전한 혼의 마음이지만, 육적 옷을 벗고, 하늘로부터 오는 옷(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을 입을 때는 온전한 혼의 마음이 된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영의 마음이 없으며, 오직 육과 혼의 마음만 존재한다. 육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노력으로 혼의 마음을 개선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선해도 불완전한 것이다. 타 종교의 예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혼을 개선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옷은 아무리 잘 빨아도 완전한 옷이 될 수 없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시므로 모든 것을 성령이 인도하신다. 그러나 육으로부터 오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혼이 예수와 함께 죽고(불에 태워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혼(그리스도의 옷:영의 몸)으로 갈아입을 때, 육체 속에 갇혀있던 영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영과 육과 혼을 정확히 이해하고 구분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게 된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갈 때 고민하고 슬퍼했다고 말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위대하신 이 분도 죽음 앞에서 혼이 심히 놀라고 슬퍼했다. 육에서 비롯되는 혼은 그렇게 반응한다. 위로받고 싶어서 제자들을 동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창세 전에 계획하신 분이 이런 발언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쉽게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혼은 그렇게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혼은 자기()라는 존재다. 혼은 불태워져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불세례는 혼에 대한 죽음을 상징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바로 혼을 바꿔 입으라는 것이다. 이전의 혼을 부인하는 것이 곧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마가복음 14 36절에서『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아프 π’ 에모우 μο)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에고 γ)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σ)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여기서 문법적으로 에고(나는)는 주어이다. 에모우(나의)는 소유격이다. 아프는 ~으로부터 라는 전치사이다. 수는 주어(당신은)이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마시옵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의미상으로는 나로부터 옮기는 것이지만, 문법적으로는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이다. 나의 것으로부터 옮기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것은 육적자아(사륵스)를 의미한다. 잔을 받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사역을 바라보는 육적자아에서 영적자아로 옮겨 달라는 말이다. 영적자아는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

41절에서『마음(프뉴마)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πνεμα πρθυμον δ σρξ이 문장의 영어(kjv)로는 The spirit truly is ready, but the flesh is weak. niv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마음이라고 번역된 것은 오류다. 프뉴마는 영(성령)이다. 성령(프뉴마)이 이끄시지만, 육신(사륵스)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말을 한다. 십자가의 사역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말이다.

헬라어 사륵스(σρξ)는 육체(body)가 아니라, 육신(fresh)이다. 육체는 살 덩어리이지만, 육신은 바로 육적자아를 의미한다. 육적자아는 육으로부터 비롯된 육적 몸(육신)을 의미한다. 이 육적 몸(육적자아)은 일곱가지의 형태로 등장한다.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육체의 본성(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고 그녀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육으로는 사륵스(육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은 영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이 육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 범죄한 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 전에 여호와이셨으므로, 육에 들어간 영은 성령으로서 죄와는 상관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영과는 상관없이 육적 몸(사륵스:육적자아)은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의 흔적으로서 누구나 다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죄를 가지고 태어나므로 육적 몸이 죄성(탐욕)을 가지게 되지만, 예수님은 비록 육적 몸(사륵스)을 가지고 있어도 성령으로 태어난 분이므로 죄성 자체도 성립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육적자아로 인해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이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4.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자

 

. 성전 이야기

 

1. 성전의 타락

마가복음 13 14절『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성전은 표면적으로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성소,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으로 이어진다. 에덴동산에서 동쪽의 산은 성전 개념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에덴동산이라는 성전으로부터 쫒겨났다. 성소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전쟁의 도구로 이용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솔로몬이 지혜로운 자였지만, 이방여인을 취하여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이 이민족을 사용하셔서, 성전을 무너뜨린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고토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유대에게 성전 건축을 학개와 스가랴라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독려했다.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이 귀환한 유대인들을 계속 다스림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한다. 스룹바벨 성전은 주전 517년 재건되었다. 성전 종교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로부터 성전에 대해서 전혀 배우지 못했다. 말라기 선지자가 경고했다. 말라기 1 10절에서“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스룹바벨 성전도 황폐화 되었다.

150년이 지난 주전 20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 출신 헤롯 대왕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며 확장시켰다. 주후 66년 완공되었다. 그러나 겨우 4년 뒤 완전히 파괴되었다. 원인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의 완악함에 있었다. 헤롯성전 파괴라는 하나님 심판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련했다.

구약 시대의 성전파괴는 신약 시대의 교회와 성도를 위해 새로운 교훈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한 하나님 나라는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곳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복음에 의해,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종교적 의식보다 말씀과 순종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말씀과 순종의 핵심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영적으로 새성전이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졌다. 요한복음 421-24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영적인 성전 역시 에덴동산으로 시작된다. 에덴동산은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에서 천사들의 타락에 대한 것이다. 유대서 16절과 베드로후서 24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으므므로, 하나님이 천사의 옷을 벗기고, 그 벌거벗은 영을 흙에 가두어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사람을 만들어 범죄한 천사의 영을 넣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속의 역할을 하는 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역할을 맡은 자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이셨다. 골로새서 1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모양(키드메테누 כִּדְמוּתֵ֑נוּ )은 키와 드메테누의 합성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כִּ)는 영어로 likeness로 번역되었다. ~와 유사하게, 닮게 라는 것이다. 그러나 닮는다는 것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속성이 같다는 것이다. 몸의 외형적 형태가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같다는 말이다. 원본과 사본이 같다는 표현이다. 같다는 말은 동일한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삼위일체의 그리스도가 바로 인자이신 첫사람 아담이라는 말이다. 삼일일체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인 것처럼 그렇게 만들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마치 성품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므로 사람은 선한 것이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에 살다가 보니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잃어버려서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이시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마지막 아담의 표상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의 몸을 주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났고 마지막 아담은 죄의 몸이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부터 태어나는 몸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첫사람 아담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으나,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지고 나서,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진다. 첫사람 아담이라는 말에서 아담은 이름이 아니라, (아다마)에서 온 사람(아담)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남자(male)라는 명칭도 아담(남자)이다. 하나님이 첫사람 아담을 잠들게 하고(죽게 하고), 갈비뼈를 끄내어 여자(하와)를 만드셨다. 그래서 갈비뼈를 끄낸 후의 남은 자는 남자(아담)가 된 것이다. 첫사람 아담(사람)은 사라지고, 남자(male:아담)과 여자(female:하와)가 만들어진 것이다. 첫사람 아담(사람)이 잠들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으로, 그리스도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남자(아담)과 여자(하와)는 이미 죄인의 모습을 한다.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들의 영들이 첫사람 아담이 준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들이 오늘날까지 인간으로 태어나는 존재들이다. 남자와 여자는 분리된 존재들이다. 첫사람 아담(그리스도)과 분리된 자들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된 자들은 세상이라는 감옥에 던져진 혼(soul)들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창세기 27절에서 영과 흙이 결합되어 혼(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말을 한다.『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soul:)이 되니라』

첫사람 아담(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형상(그리스도:성전)이 있었는데, 남자(아담)와 여자(하와)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이다. 창세기 127절에서『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사람을 창조한 것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이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자, 즉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성전)에서의 타락은 곧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동산으로부터 세상으로 쫒겨나는 그림이다. 타락한 천사의 영이 흙과 결합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창세기 62절에서『하나님의 아들들(범죄한 천사)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범죄한 영이 흙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세상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이게 성전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성전의 타락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자기라는 존재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라는 우상은 인간을 세상에서 탑을 쌓게하고, 유명한 용사가 되게한다.

사람의 심령 속에 세워진 성전(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옛성전(옛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성전은 무너지고 새성전이 들어서야 한다는 말로 포도원의 비유를 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세를 주고 갔는데, 때가 되어 임대료를 받으러 하인을 보내었더니 때리고 죽이고, 아들마저 죽여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포도원을 임대해준 자를 진멸하고 새사람에게 포도원을 임대해준다는 내용이다. 새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심령 속에 하나님의 형상인 새성전이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들어와 하나님 나라를 부어주신다.

마가복음 13 14절『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예수님 당시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한 로마 군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사람의 성전(옛성전)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육적자아 이다. 육적 자아는 육으로 비롯된 육적 몸(사륵스:fresh)을 의미하며, 가나안에서 일곱 족속과 같은 자인 것이다. 이 사륵스는 인간의 주인 노룻을 한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71-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이스라엘이 극복해야 되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극복해야만 할 영적 전쟁이 되는 것이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은 인간의 육적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성도의 심령 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육체의 본성, 혈연관계, 경험과 지식, 사상과 이념, 종교심, 자기의 의, 지배하고 싶은 욕망 등이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성도의 심령 속에 육적 자아가 움직이는 것을 보거든, 새성전으로 빨리 들어가라는 말이다. 새성전은 하나님의 성전(나오스 데우 νας θεο)이다. 성도를 괴롭히는 것을 환란(들맆세이 θλίψει)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성도는 인내(휘포모네 ὑπομονῆ)하여, 성전에 들어가 기도로서(프로슈콘 προσευχῶν) 이겨내라는 말이다. 그러면 임재(파루시안 παρουσίᾳ)하신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부수듯이 이기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2. 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가복음 11 12-14절『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영광을 나타낼 때도 있고, 저주나 심판을 나타낼 때도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의 무화과나무로,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기면 심판의 무화과나무로 표현했다.

안식과 영광을 나타낼 때는 열왕기상 425절에서『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무화과 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안식을 얻는다 라는 표현이다. 심판을 나타낼 때는 시편 10533절에서는『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라는 표현이 있다.

요한복음 1 48-49절에서『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공부할 때, 회당에서 주로 하였지만, 회당이 없는 곳은 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율법을 공부하는 목적은 자신들을 속박에서 구원하여 줄 메시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공부하였을 것이다. 특히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주된 것이리라. 그래서 나다니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율법을 읽고 묵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나다니엘에게 말한 부분이 바로 이러한 정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다니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이 말하자 말자,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는 것이다. 물론 빌립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런 상황과 연결되어 바로 이런 말이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연결하는 사다리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0-51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여기에서 인자는 사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세기 2812-13절에서『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사다리(인자) 위에서 사자(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말이다. 인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권능을 가졌지만,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님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교회 사람들이 천사가 예수님의 수호 천사들인가 라는 생각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는 범죄한 천사들이 첫사람 아담이라는 육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고, 다시 마지막 아담이라는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의 몸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몸, 영의 몸은 부활한 영화로운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232절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산자라는 말은 영생을 의미하는 부활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나다니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결국 내가 메시야이고,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으로 흙에 갇혀 세상에서 인간이 되었는데, 육적인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하나, 나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나와 함께 죽으므로 대속의 죄값을 치르고, 영적인 너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부활하여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다니엘은 간절히 메시야를 찾던 중이라 예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성경의 모든 핵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것이 아니면 성경 말씀이 아닌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만 말하거나, 부활만 말하는 것도 반쪽짜리 복음이 된다. 둘이 항상 붙어있어야 진정한 복음이 된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과거나 먼 미래로 받아들인다면 그 또한 하늘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는 자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과거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으며, 예수님의 부활은 열매맺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말을 한다. 고린도전서 15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존재(그리스도)이므로 사람으로 표현한다. 역할을 달리 할 뿐이다. 첫사람 아담은 범죄한 천사들의 죄를 뒤집어 쓰고 흙에 갇혀,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죄의 몸을 전해주는 역할로, 마지막 아담은 범죄한 천사들이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부활의 몸을 주기 위한 역할로 세상에 온 그리스도인 것이다. 부활을 부모로부터 받은 육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 자는 마치 흙이 영생의 몸으로 변한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고, 부활은 영생의 몸으로 새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1-25절에서『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파루시안)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파루시안을 강림이라고 반역하므로 마치 먼 미래에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파루시안 임재이다. 부활한 성도의 심령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들어가 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에는 이를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 심판의 재림으로 등장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천년왕국을 이룰 때, 왕노릇한다는 말이다.

무화과 나무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말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현재적 부활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전도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도 핵심인 현재적 부활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3. 포도원 농부의 비유

마가복음 12 1-5절에서『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휘테오)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게오르고스)에게 세로 주고(에크디도미)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 때가 이르매(토 카이로)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아티마조)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악한 농부의 이야기이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보냈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비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으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축복이 넘어간다는 것이다

1212절에서는『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고, 새로운 성전(부활)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냐 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오히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그들에게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라고 묻는다. 종교지도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침묵 속에는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하늘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포도원 주인)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선지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다.

표면적인 비유를 통해서 이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한 사람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는 집주인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포도원은 집이라는 개념이 된다. 집은 성전이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았는데, 성전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에서 성전의 개념은 이스라엘로 표현되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전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즉 성도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헬라어 휘테오는 심다라는 의미다. 성전(옛사람:돌성전)을 심령 속에 심은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농부들에게 세를 준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심령 속의 성전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다.

에크디도미는 빌려주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성전을 심어놓았는데, 아직 나의 것이 되지 않은 것이다. 심령 속의 성전은 세를 통해서 넘겨받은 포도원이다. 게오르고스는 농부로 표현되었지만, 땅을 경작하는 자이다. 심령 속의 밭을 경작하는 것이다. 굳었던 땅을 갈고 옥토를 가꾸는 것이 농부의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성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농부이나 땅을 갈지 않은 그런 상태라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다 그렇다는 것을 말해준다.

농부가 땅을 경작하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주인으로 부터세를 받았으니, 농부가 주인에게 열매를 바쳐야 한다. 열매는 심령 속의 성전을 통해서 영생(그리스도)을 얻는 것이며, 그 영생이라는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열매를 드리는 것은 곧 자신을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며, 이것이 영적 예배라는 말이다. 하나님도 농부이고, 세를 물려받은 성도 역시 농부라는 것이다. 농부는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타국에 갔더니(아포데메오)』아포데메오는 집밖으로 나가다, 외국을 나가다 라는 의미다. 집은 성전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심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성전 밖에 있는 것이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하나가 아니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하나님이 그의 영을 흙에 가두어 분리되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이 밖에 계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들은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성전이 있음에도 장사하는 소굴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 성전에 계시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를 준 그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이런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주여 라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밖에 나가셨던 집주인이 때가 되면 찾아오신다. 포도원의 소출을 받으러 종을 보내시는 것이다. 토 카이로(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시간이 된다. 하나님이 심령 속으로 들어오면 성도가 카이로스(영생)가 되지만, 하나님이 밖에 있으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크로노스가 된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카르포스)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포도나무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님은『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니』에서, 가지에서 열매(그리스도)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영생의 열매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열매를 맺는 자가 안식에 있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이신 그리스도로 열매를 맺으므로, 이제 십일조가 완성이 된 것이다. 십일조는 전체 중에서 십분의 일을 내고, 그것을 통해서 전체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전체가 다 완성이 된 이후에도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말은 열매(영생)의 의미를 모르는 자가 된다. 세를 받은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성령)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의 열매가 있다면, 그 농부는 열매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이사야 51-3절에서『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사야 5 7절에서는『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자기의 의에 도취해서 그리스도를 오히려 십자가에 죽게 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보낼 것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당시 유대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심령 속에 한 선지자를 보내주는데, 사람들은 거부하는 것이다. 첫번째 종을 때리고 돌려보냈고, 다른 종도 때리고 능욕하고(아티마조) 돌려보냈다. 아티마조는 불명예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기 전에 종들을 보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상징한다. 이 종들(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 약속은 창세기 315절에서 나타난다.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선지자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므로 때리고 능욕하는 것이다.

세번째 종을 보냈더니,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그런데, 누가복음 2012절에서는『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세번째 종에서, (3)이하는 의미는 완전한 것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을 통해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의 의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날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2333-34절에서『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제사장 그룹,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괴롭혔으며, 결국 죽이기까지 했다. 이 말에서, 오늘날 교회 신도가 볼 때 분노스럽지만, 신도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을 때는 의아스러울 것이다. 하나님은 심령 속에 성전(옛성전)을 세워 세를 주고 갔지만, 성경을 통해서 수없이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해도 그들을 오히려 핍박하고 능욕하기까지 하며, 심지어 교회라는 건물에 모여서 날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지경에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26절에서『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이 말과 누가복음 2013절에서『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티 포이에오)』개역개정에는 어찌될까 라고 번역되었지만, 헬라어로 보면 어떻게 완성하지 라는 것이다. 포이에오는 완성하다, 창조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내가 포도원을 심었는데, 즉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심었는데, 어떻게 이를 완성하지 라는 말이다. 어떻게 열매를 맺어서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해 줄까 라는 고민이 섞여 있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게 하기 위해서는 농부는 아들을 보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죽을 줄 알면서 보내는 것이다. 존대한다(엔트레포)는 말은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드리는 것이 회개이다. 심령 속에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가 회심하는 자요,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대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7-9절에서,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클레로노모스)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논의하고 분석해보니, 이 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는 것이다 라고 스스로 결론내리는 것이다. 클레로노모스는 클레로스(제비뽑기)와 노모스(율법)의 합성어이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율법을 통해서 하늘의 상속자가 되고자 하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성전 밖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에서, 와서(에르코마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다는 말이다. 육적인 자아(악한 농부)가 진멸당하고 영적인 자아(다른 사람)가 살아나면 포도원(새성전)을 주는 것이다. 진멸당하는 것은 옛성전의 파괴이며,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옛사람(육적 자아)이 죽는 것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진멸당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옛성전(옛사람)이 무너지고, 새성전(새사람:부활)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전의 포도원(옛성전:옛사람)이 아니라 다른 포도원(새성전:세사람)을 넘겨주는 것이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영적 자아)에게 주는 것은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건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육신이 죽고, 영의 몸을 입고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는 성새전(지성소)이 세워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이다, 육체 속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열매맺는 일이 된다.

요한복음 167-8절에서 보혜사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악한 농부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육적 자아가 성전을 장사하는 것으로 만든 것이 죄이고,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 자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의가 되며, 그래서 육적 자아(악한 농부)가 심판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성도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어야 할 옛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킬 때(진멸당할 때), 새사람으로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게 새로운 포도원이 된다.

 

. 결혼 비유

 

1. 모세의 이혼증서

마가복음 101-5절에서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모세가 이혼하기를 원하는 모든 완악한 자에게 이혼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기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간음한 완악한 자이다. 10 11-12절에서『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그런데, 모세의 이혼증서가 있으면, 간음이 아니라 재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모세의 이혼증서는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로마서 72-3절에서『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여기에서 이혼증서는 곧 남편의 죽음을 의미한다.

74-5절에서『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우리라는 사람에게는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 창세기 2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사람은 영과 흙으로 된 혼이라는 생명체인 것이다. 그래서 영은 흙과 결합(결혼)하여 혼이라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는 율법 아래 매인바 되었으므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영은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하고, 흙은 사람의 딸을 의미한다. 이 둘이 결혼을 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죽어야 할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영은 영적 정체성을 의미하고, 흙은 육적 정체성을 의미한다. 영이 육적 정체성과 결혼하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혼을 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되는가? 즉 남편인 육적 자아가 죽으면(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는 것은 육적 자아가 죽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영적 자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함께 부활에 참여하므로 새로운 혼인관계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세가 준 이혼증서는 육적 죽음을 보장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의미는 육적 자아도 법적(율법)으로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율법에 대해서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72절에서『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갈라디아서 429-30절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약속 아래 있는 자를 비유한다.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으로 난 자는 육적자아(이스마엘)를 의미하고, 성령을 따라 난자는 영적자아(이삭)를 의미한다. 육적으로 난 육적자아는 성령으로 난 영적자아를 핍박한다. 그래서 사람의 심령 속에는 영적자아가 나타나지 못하고 육적자아가 왕노릇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적자아를 쫒아내라는 말이다. 육적자아를 쫒아내는 방법은 이혼증서를 가지면 된다. 곧 모세가 주는 이혼증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 증서를 받으려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연합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유일하게 육적자아를 내 쫒는 일인 것이다.

율법에 대해서 자유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 뿐이다. 자신은 십자가에서 율법에 대해서 죽지도 않으면서 『성령받았다』 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영적 간음이라는 말이다. 율법에 매여있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자를 음녀라고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다 율법에 매여있는 것이다. 다 죄인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자신이 율법에 대해서 죽지도 않으면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한다. 음녀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로마서 81-5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적자아를 의미하고, 영을 따르는 자는 영적자아를 의미한다. 이 둘이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사람 안에서 심령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라는 말이다. 모세의 이혼 증서(십자가의 죽음)를 받게 되면, 정식으로 새로운 혼인을 할 수 있다. 이게 부활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천국 혼인잔치가 이루어진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2. 남녀가 하나가 되는 것의 의미

 

마가복음 106-9절에서『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여기에서『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 부분을 헬라어로 보면, π δ ρχς κτσεως ρσεν κα θλυ ποησεν ατος 여기에서, π(아포: ~으로 부터) δ(:접속사) ρχς(아르케:첫째되는) κτσεως(크리데오스:창조물의). 이것을 다시 한글로 다시 번역하면, 첫째 되는 창조물로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으니라고 해야된다. 첫째되는 창조물은 아담(사람)인 것이다. 남자도 아담, 사람도 아담으로 되어있으므로 번역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 사람(아담)에게서 여자(갈비뼈)를 분리해내셨으므로, 그 사람(아담)이 남자(아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첫사람은 남녀가 되기 전의 사람인 것이다.

창세기 221-2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이샤) 만드시고 그를 아담(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이쉬)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1, 22, 23절의 아담은 이름의 아담이 아니라 사람(아담)이라 해야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깊히 잠들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취하신 그 갈비대로, 라고 번역해야만 한다.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이 부분도 히브리어를 보면, 이샤(여자) (~) 메이쉬(남자에게로) 루카하(취하여졌다) 조트(이 여자를)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이것(여자)이 남자에게로 취하여졌기 때문에 여자라 불러질 것이다.』메이쉬를 문법적으로 분석하며, 메는 민이라는 전치사(방향을 의미)의 생략형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남자와 여자로 분리된 것을 강조한다. 사람은 첫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남자(그리스도)와 여자(범죄한 천사의 영)는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을 의미한다. 곧 여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범죄한 천사의 영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상에 갇혔는데,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창세기 2 24절에서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이샤)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여기에서, 부모는 하나님이시다. 남자는 그리스도, 아내라고 번역되었지만, 이샤(여자)이다. 여자는 하나님을 떠난 범죄한 영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약성경 에베소서에서도 같은 의미로 강조되고 있다. 에베소서 531-32절에서『그러므로 사람(안드로포스:νθρωπος)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귀나이카: γυνακα)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안드로포스는 사람 또는 남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남자로 번역함이 타당할 것이다. 귀나이카(기본형은 귀네)는 여성 또는 부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여자로 번역함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224절의 의미와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교회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의미한다. 성도는 원래 하나님을 떠난 자(영이 흙과 결합된 존재)였는데, 그리스도를 만나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하나님을 떠났다가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가 되었는데, 다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도가 율법 속에 있다가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율법 속에서 희생제물을 통하여 그리스도(복음)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것을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는데, 그리스도를 떠나 다시 율법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제 복음 속에 있는 자를 받아드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이 복음을 거부하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만일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복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자일 것이다. 스스로 복음을 받아드렸다고 믿지만, 의미도 모른채 말로만 믿는 것이다.

마가복음 102-5절에서『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모세가 써 준 이혼증서는 율법을 의미한다. 영적 이혼은 하나님의 복음을 떠나 율법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 속으로 들어가는 자는 마음이 완악한 자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천국을 이룬다고 말을 하면서도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율법을 따르는 것은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마태복음 76절『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빌립보서 3 2절에서『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몸을 상해하는 일은 율법에 따라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개와 행악 자와 육체에 할례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율법에 대해서 다 죽었는데, 다시 율법을 적용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무시하는 개와 같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팔아서, 값을 주고 사는 교회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여전히 율법을 따르려고 하며, 죄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을 개와 돼지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가 사해졌지만, 율법에 근거해서 다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판단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개, 돼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개와 돼지들이 교회(복음의 성도)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발로 밟고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회유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이키도록 한 것이다. 그들이 핍박과 회유를 해서 성도들을 괴롭혔다.

오늘날 교회에서 율법주의로 회귀하는 사례가 많다. 십일조가 의무조건이라든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현혹하고, 주일성수를 고집하고, 안식일을 지켜 행해야 한다거나, 신종 절기를 만들어서 지켜나가야 한다는 등의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 그들은 엄밀히 복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11-12절에서『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다른데 장가가고 시집가는 행위는 복음을 두고 율법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반쪽 복음이라고 한다. 반쪽복음은 죄의 문제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육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만 눈에 들어오고 부활은 믿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의 일처럼 여긴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보혈만 적용되고 부활은 육체가 죽어서 적용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연합되어야 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로마서 63-5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십일조의 이야기

 

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마가복음 12 17절『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표면적으로는 세금 문제로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라의 백성이라면 나라의 임금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으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은 무엇인가?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에 따라, 성령 아래 있는 자는 성령을 따라 세금을 내면 되는 것이다. 율법은 레위기 27 30절에서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구약시대는 율법에 따라 그렇게 드렸다. 율법을 반드시 지켜야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십일조를 반드시 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십일조를 하는 이유를 알고 내야만 한다.

마태복음 2323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부분의 헬라어를 보면, τατα [δ] δει ποισαι κκενα μ φιναι. 『이것도 행했어야 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라고 번역된다.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 하였으니 여전히 십일조를 해야한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과거의 일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을 보고 너희들이 이것도 행했어야 하고 저것도 행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행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했지만 정작 율법이 말하는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과거의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십일조는『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야를 발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일조를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십일조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으로 하나님나라로 돌아가야만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다.

성령 아래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래서 영적 산 제물이 되었으며, 영적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께 다 드린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되는 것이 영적 십일조가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자신을 전부 하나님께 드린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16절에서『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한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은 가이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이시다. 히브리서 13절에서『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골로새서 1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역시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이다. 로마서 121-2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도키마조)

마음(노오스 νος)을 새롭게(아나카이노세이 νακαινσει) 하므로서 변화(메타모르포스데 μεταμορφοσθε)를 받아에 대해서, 헬라어 성경을 보면, λλ μεταμορφοσθε τ νακαινσει το νος우리 말 번역이 잘못되었다.『변화를 받아 마음이 새롭게 되므로서』라는 말이다. 메타모르포스는 영어로 be transformed이다. 모양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산 제물로 드려지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그 말이다. 그래서 부활한 몸을 가지므로, 영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부활되지 않은 몸을 가지므로, 육의 마음이었지만, 부활되므로 이제 영의 마음이 되므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그것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교회라는 모임에서 내는 돈은 십일조가 아니라, 교회를 운영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헌금을 자유롭게 하면 되는 것이다. 율법에 따른 십일조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성도라고 믿고 있으면서 십일조를 해야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과연 현재적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는가를 깊히 생각해야만 변화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성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는 것이다. 도키마조는 분별하다 라는 말이다. 이러한 이치를 분별하여 행동해야만 한다.

 

2. 십일조는 반드시 내야하는가

마가복음 1241절『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다.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율법에 근거한다. 레위기 27 30절에『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라고 했는데, 오늘날 십일조의 근거를 이 규정에 근거하여 찾기도 하고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전쟁 후 멜기세덱에게 바쳤다 라든가 야곱이 서원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3 23절에서 다시 십일조를 설명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굵은 부분의 헬라어를 보면, τατα [δ] δει ποισαι κκενα μ φιναι. 『이것도 행했어야 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라고 번역된다.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 하였으니 여전히 십일조를 해야한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과거의 일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을 보고 너희들이 이것도 행했어야 하고 저것도 행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행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했지만 정작 율법이 말하는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과거의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십일조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예수님이 마태복음 23 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일조를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십일조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으로 하나님나라로 돌아가야만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래서 영적 산 제물이 되었으며, 영적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께 다 드린 것이다.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모든 것을 드리는 개념이며, 그 중에서 대표하여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다. 비록 물질을 드리지만 자신을 드리는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물질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전히 물질의 십일조를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린 적도 없는 자들이 된다. 교회 사람들이 영적인 의미도 모른채, 십일조를 물질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자신을 전부 하나님께 드린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 건물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에 불과하다. 교회 건물은 성전도 아니며,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그러나 교회 건물을 이용할 때는 재정적인 부담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헌금으로 충당한다. 교회 건물 유지 보수비, 목회 사례비 등이다. 그런데, 교회를 운영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많이 들어오기를 내심 바랄 것이다. 

 

때로는 목회자들이 마태복음 23 23절의 내용을 근거로 “이는 율법에 따른 강제 규정이므로 십일조를 여전히 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심지어는 봉투에 십일조 봉투를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도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십일조를 강요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지 않는 자와 같다. 하지만, 교회 건물의 운영상 필요한 재정은 신도들이 헌금을 해서 충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근거하여 강제적으로 십일조라는 개념으로 교회에 돈을 내게 하는 자와 돈을 내는 자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지 않는 자와 같은 이치다. 따라서 십일조가 아니라, 헌금으로서 자신의 역량에 맞게 돈을 교회에 기부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얼마를 할 것인가는 돈을 기부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중요한 것은 율법의 그물에서 제발 벗어나라는 말이다. 목회자들이 여전히 율법의 그물을 신도들에게 씌워 자유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행위인가를 신도는 깨달아야만 한다. 그들에게는 돈이 중요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신도들을 위해 율법에 대해서 죽고, 율법의 그물에서 자유를 주셨는데, 여전히 율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없는 자가 될 것이다. 

 

 

5. 죽음과 부활

 

. 십자가의 죽음

 

1.성경을 이루려 하심

마가복음 14 46-50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성경을 이루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언약의 성취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539절에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여기에서 성경은 바로 구약성경이다.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씀이다.

성경의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시고 순종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종하므로, 이전의 것은 무효화되고, 새사람과 다시 언약을 체결하신다.

가장 먼저 언약을 체결한 사람은 아담이였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태어난 아담을 에덴동산에 넣어주시고,『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므로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다. 불순종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동물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동물의 가죽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체결하신다. 그 새언약이 바로 창세기 3 15절의『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여자의 후손은 장래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약 속에 들어가지 않은 자를 모두 심판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아시대 대홍수를 통해서 노아와 그 가족 8명을 제외하고는 멸절시켰다. 모든 인간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할 그런 존재라는 것을 물심판(물세례)를 통해서 알려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하셨다. 창세기 9 9-13절에서『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 언약은 장차 불로 심판하실 것(불세례)을 예고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 6-7절에서『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세상의 모든 인간은 불심판을 받아야 할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세번째 언약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장차 약속의 자녀와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언약으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동물들을 죽여서 반으로 갈라놓았을 때 하나님의 불이 그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 이후 13년간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브람이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할례를 행하게 하셨고, 다음해 약속의 자녀를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몸이 죽은 것같이 되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약속의 자녀를 믿었는데, 그 자녀가 바로 이삭(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할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고, 약속의 자녀 이삭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이 부활시키는 믿음인 것이다.

그 다음의 언약이 바로 시내산에서의 언약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새긴 두 돌판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두 돌판을 받을 때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돌판을 깨어버렸다.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이 친히 만드셔서 모세에게 주셨으나, 두번째 돌판은 모세가 만들어야 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아 회복은 되지만, 그 휴유증은 남는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첫번째 돌판과 두번째 돌판은 마치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과 같은 모양이다. 첫사람 아담은 죄의 몸을 주고, 두번째 사람 아담은 영의 몸을 주었다. 따라서 두번째 돌판은 성도의 심령 속의 세워진 성전과도 같은 것이다. 첫번째 돌판은 깨어지고(죽고) 두번째 돌판이 새로 새겨져(다시 태어나), 언약궤 안에(성도의 심중의 성전 안에) 들어있다. 두번째 돌판은 새로운 법으로서 그리스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921절에서『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번째 돌판을 받고,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정탐꾼을 보냈는데, 열정탐꾼은 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모든 백성들이 그 말을 믿고 통곡하며 울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사람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시 19세 이하의 아이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만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새언약을 맺으신다. 그 새언약은 가나안 입구인 모압 땅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새사람들에게 당부하는 언약의 말씀이었다. 가나안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며,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신명기 29 1절에서『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그래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자기 백성이 되게 하신다고 맹세까지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물리치고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성도에게도 일곱 족속이라는 육적 자아가 있다. 그래서 심령 속에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중간 과정에서 소금언약, 제사장언약, 다윗언약 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을 알려주시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언약을 깨어버렸다. 그 내용들이 예레미야에서 언급된다. 예레미야 1장에서 백성들은 이방민족의 침략을 받아 지배당하고 백성들은 끌려간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유배되어 바벨론에서 고초를 겪고, 회개하여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31 32-34절에서 새언약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대한 언약을 지켜나갔지만, 이후 다시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정작 메시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신성모독죄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들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 2028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에『내가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얼마나 원하였는냐』라고 하셨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유월절 음식을 먹는 것은 예수님이 대속물로 죽는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누가복음 2219-20절에서『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켜 주신다는 언약이 바로 새언약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잡히시므로, 제자 중 한 사람(베드로)이 칼로 대제사장의 귀를 쳤다. 인간적으로 보면 용감한 일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14 50절에서 나머지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도망가지 않고, 그 주위를 배회하다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게 된다.

오늘날도 성경을 이루려 하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나뉘어 진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와 자신의 죄를 대속한 것을 믿지만 죽은 예수를 멀리서 구경하는 자로 나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면 성경(언약)을 이룬 자가 되지 못한다.

 

2.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심

예수님은 이미 3차례에 걸쳐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예언하신 바 있다.

첫 번째 예언에 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신앙고백으로 이끌어 내시고 그들로부터 세워져 나갈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신 직후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제 곧 닥치게 될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선포하시고, 그들도 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겪으신 것과 같은 운명에 처하실 것이기에 그들이 어떠한 정신과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제자의 도를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831-33절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그런데,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예수님이 꾸짖었다.

두번째 예고는 예수께서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알려주신다. 이 예고를 해 주신 때는 제자들이 갈릴리에 다시 모이게 되었을 때에 말씀하시는 것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첫 번째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가 있은 지 엿새 후 갈릴리에 있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변화산으로 불리게 되는 산에로 갔다가 갈릴리로 다시 돌아와 그곳에 머물며 사역하신 그때를 뜻한다.

마가복음 931-35절에서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누가 크냐 라고 논쟁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어린아이로 비유하며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9 37절『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파이니온 παιδων)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이런 어린아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의미한다. 그들이 현재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이지만, 장차 너희들을 영접할 것인데, 그러면 나를 영접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린 아이의 비유를 계속해 나가신다. 그만큼 예수님은 영적 어린아이 같은 제자들의 역할과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예고는 요단강 건너 유대지경(요단강의 동편)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도중인 여리고에 이르기 전의 어느 곳에서 하셨는데 마가복음 1033-37절에서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이 메시야로 세상에 와서 권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난 후에 권력의 자리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을 세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사람의 일로, 누가 크냐, 그리고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요청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38-4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예수님은 자신이 마실 잔(십자가의 죽음으로 흘리는 피를 상징)을 말씀하셨다. 그 의미도 모르는 제자들은 마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삼은 언약의 성취를 의미한다. 옛언약의 성취로 새언약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언약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되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부활하는 것이다. 현재적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새언약이 성취되는 것이고, 약속대로 심령 속에 옛성전이 파괴되고, 새성전이 세워질 것이다. 새성전이 세워지면,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재림하여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게되고, 성도는 열매의 씨를 계속 퍼트릴 것이다.

 

3.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마가복음 1242-44절『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성경은 표면적으로, 비유적으로, 상징적으로, 영적인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과부란 돕는 베필이 없는 자를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을 떠난 자를 상징한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자이고 영적 과부라는 의미가 된다. 당시 유대 사회로 돌아가면, 힘없고 불쌍한 유대 백성들을 지칭할 것이다. 예수님 역시 성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나셔서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모습은 죄인의 모습이요, 세상에 대해서는 가난한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과부인 것이다.

표면적으로 서기관들이 과부에 대해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전해진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의 지도자들이 실제로 과부의 재산을 강탈한 것들 것 있었다고 전해진다. 서기관들은 돈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율법적으로 도움을 주고 돈을 받았으며, 서기관들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에 따라 변호사 일을 수임 받아 행하면서 과부들 몰래 재산을 빼돌렸으며, 서기관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과부들의 재산을 잘못 관리하여 손해를 끼치기도 했다. 서기관들은 중보기도의 대가로 우매한 여인들에게 돈을 받았으며, 현실적으로 갚기 어려운 채무를 빙자해서 과부의 집들을 담보로 잡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유대지도자들이 율법주의에 근거해서 성전과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힘없는 백성을 강압적으로 약탈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선으로 가득찬 예루살렘 성전은 곧 무너지고 새성전이 도래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무화과 나무(이스라엘)를 저주하셨다. 그리고 유대지도자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은 과부(케론 χηρν)의 가산(오이카스 οκας)을 삼킨다(카테스디온테스 κατεσθοντες)고 말하고 있다. 마가복음 1340절에서『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ο κατεσθοντες τς οκας τν χηρν)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케론은 특정 과부라기 보다 율법의 짐을 메고 유대지도자들 밑에서 허덕이는 불쌍한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오이카스는 가산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집들이다. 집은 성전을 의미한다. 이 돌성전은 헤롯이 백성들의 혈세로 지은 것으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을 것이다. 카테스티온테스는 삼키다 먹다 라는 의미로 유대지도자들이 추구하는 율법주의가 백성들을 그물 속으로 끌어들여 족쇄를 채우는 격이다.

예수님은 이 과부가『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가난한(휘스테레세오스 στερσεως)이란 말은 부족 또는 결핍을 뜻한다. 즉 이 과부에게는 여분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참새 반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드리고 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였던 것이다. 과부의 돈은 상대적인 가치로 따지자면 아무 것도 아닌 푼돈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녀 자신의 생계유지에 비추어 본다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돈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돈을 하나님께 바쳤다. 

예수님이 전 재산을 드린 과부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제자들에게 과부처럼 전 재산을 다 헌금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부패한 유대교로 인해 모든 재산을 다 강탈당하고 생존의 위협까지 받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율법을 따라 과부와 같은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 버리고 역으로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부패한 종교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 망할 것이다 라는 메시지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이어지는 감람산 강화를 통해 돌 성전은 무너지고 새로운 성전이 도래할 것을 예고 하셨다. 이 말씀은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귀족계급이 된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이며, 오늘날 귀족 계급이 된 많은 교회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돌성전은 무너지고 새성전(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 도래할 것을 예고하시면서, 자신은 고난받아 죽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던 과부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영적 과부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리셨다. 로마서 121-2절에서『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역시 영적 산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4. 성전의 무너짐

마가복음 13 1-2절『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 하셨다. 제자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이 웅장한 성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느닺없이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언제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 여쭈어 보았다. 누가복음 2120절에서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이 로마의 공격을 받을 것인데, 그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은 A.D.70년에 무너졌다. 예루살렘 성은 워낙 견고히 지어졌으므로, 로마 군대가 성을 에워씨고 무너뜨리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의 모습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유대인들 중에는 열심 당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수시로 로마 군대를 공격했다. 그들은 이전에 유대인들이 안티오크스를 공격하여 유대땅에서 시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하스모니아 왕국을 세웠는데, 이 왕국이 로마에 멸망당하였는바, 열심당원들이 이를 재건하려고 한 것이다.

엘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한 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는데, 왕이 죽은 후에 정복한 나라(헬라제국)4개의 나라로 분열되었고, 헬라 제국의 4대 분할 왕국 중 하나인 시리아 왕국의 셀류쿠스 왕조 제8대 왕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3)가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한 사건이 발생했다.

유대에 대한 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의 제1목표는 유대교를 말살하고 헬라종교를 그 지역에 심는 것이었다. 이에 에피파네스는 2 2천의 군대를 파견하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는 싸우지 않을 것을 이용해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대부분 약탈당하고 불태워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잡혀 갔다. 그리고 B.C. 167년에는 드디어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지켜 오던 율법 준수를 금하기에 이르렀다. 즉 안식일 준수, 절기시에 행하는 축제, 번제 제사, 어린아이의 할례 등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율법서를 모두 불태우며 성전 제단에서 부정한 제물로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어기는 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이 같은 가증스러운 행위가 절정에 이른 것은 B.C. 167 12 16일이었다. 성전에 제우스 신상이 세워지고 번제단 위에 돼지고기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이 같은 제사를 매월 25일에 지내게 했는데, 이 날은 에피파네스의 생일이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에피파네스 자신을 위해 제우스 신상 앞에서 제사를 드리게 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피파네스의 크나큰 실책이었다. 유대인들의 종교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에 반해 등장한 인물이 마카비였다. 주전 2세기에 유대 백성들과 함께 항전하여 셀류코스 군대를 몰아내고 독립적인 유대왕국을 설립한 영웅이다. 그래서 하스모니아 왕국이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열심당원들이 전쟁을 벌이는 목표는 하스모니아 왕국을 재건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로마가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는 그런 사태까지 온 것이다.

당시 사회의 모습을 예수님은 여러가지 비유로 또는 사실로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36절에서『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대표적인 인물이 사도행전 536-37절의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마가복음 137-8절에서『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당시 사회 상을 보여주신다. 거의 매일 전쟁을 하고, 각 나라 사람들이 모여진 로마 군대와 이스라엘이 싸우고, 그 당시에 지진도 자주 발생하였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돌성전이 무너지고 새성전을 주시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새성전을 위해서는 이 돌성전은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허락하시고, 이후 스룹바벨성전, 헤롯을 성전까지 왔는데, 그 기능이 재대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전이 장사하는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새성전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139-10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새성전은 돌성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 성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부활하였음을 믿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으므로 그의 심령 속에 새로운 성전이 세워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 된다. 그런데,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현재적 부활을 전하면, 당장 핍박이 온다. 교회 안에서 형제라고 말을 하면서도 이런 이단 같은 말을 하면 당장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핍박을 받았다. 유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으로 복음이 들어가게 된다. 유대인 바울이 등장하고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확장된 것이다. 1311-13절에서『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가복음 14-15절에서『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다니엘 927절을 연상하는데,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이는 앞에서 언급한 안티오크스 4세 에피파네스를 의미한다. 마가복음에서는 로마 군대가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조짐이 보이면, 빨리 대피하라는 말씀이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리 예고하지 않았다면 제자들도 화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상황을 파악하고 다른 곳으로 미리 가버린 것이다.

13 23-25절에서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나라가 멸망당할 때,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이사야 344-5절에서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

예루살렘(돌성전)의 멸망은 새로운 성전의 도래를 예고한다. 환란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노아의 홍수로 세상은 멸망당하고,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큰 권능으로 새로운 시대에 다가온다. 1326-27절에서『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성도는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가 된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도 옛성전(옛사람)이 있다. 이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 새성전(새사람)이 새워지는 것이다. 당시는 이미 새로운 성전이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확산되어 간 것이다.

마가복음 11 12-14절『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영광을 나타낼 때도 있고, 저주나 심판을 나타낼 때도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의 무화과나무로, 불순종하여 우상을 섬기면 심판의 무화과나무로 표현했다.

안식과 영광을 나타낼 때는 열왕기상 425절에서『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무화과 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안식을 얻는다 라는 표현이다. 심판을 나타낼 때는 시편 10533절에서는『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라는 표현이 있다.

요한복음 1 48-49절에서『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공부할 때, 회당에서 주로 하였지만, 회당이 없는 곳은 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율법을 공부하는 목적은 자신들을 속박에서 구원하여 줄 메시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공부하였을 것이다. 특히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주된 것이리라. 그래서 나다니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율법을 읽고 묵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나다니엘에게 말한 부분이 바로 이러한 정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다니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이 말하자 말자,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는 것이다. 물론 빌립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지만, 자신의 이런 상황과 연결되어 바로 이런 말이 튀어나오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연결하는 사다리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0-51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여기에서 인자는 사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세기 2812-13절에서『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사다리(인자) 위에서 사자(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말이다. 인자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권능을 가졌지만,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예수님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교회 사람들이 천사가 예수님의 수호 천사들인가 라는 생각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는 범죄한 천사들이 첫사람 아담이라는 육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고, 다시 마지막 아담이라는 영의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의 몸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몸, 영의 몸은 부활한 영화로운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232절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산자라는 말은 영생을 의미하는 부활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나다니엘에게 하시는 말씀은 결국 내가 메시야이고,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천사의 영으로 흙에 갇혀 세상에서 인간이 되었는데, 육적인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하나, 나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나와 함께 죽으므로 대속의 죄값을 치르고, 영적인 너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부활하여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나다니엘은 간절히 메시야를 찾던 중이라 예수의 말씀을 듣고 바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성경의 모든 핵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것이 아니면 성경 말씀이 아닌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만 말하거나, 부활만 말하는 것도 반쪽짜리 복음이 된다. 둘이 항상 붙어있어야 진정한 복음이 된다.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과거나 먼 미래로 받아들인다면 그 또한 하늘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는 자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과거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으며, 예수님의 부활은 열매맺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말을 한다. 고린도전서 15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존재(그리스도)이므로 사람으로 표현한다. 역할을 달리 할 뿐이다. 첫사람 아담은 범죄한 천사들의 죄를 뒤집어 쓰고 흙에 갇혀,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죄의 몸을 전해주는 역할로, 마지막 아담은 범죄한 천사들이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부활의 몸을 주기 위한 역할로 세상에 온 그리스도인 것이다. 부활을 부모로부터 받은 육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 자는 마치 흙이 영생의 몸으로 변한다고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고, 부활은 영생의 몸으로 새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1-25절에서『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파루시안)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파루시안을 강림이라고 반역하므로 마치 먼 미래에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파루시안 임재이다. 부활한 성도의 심령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들어가 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에는 이를 믿지 않는 모든 자에게 심판의 재림으로 등장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 천년왕국을 이룰 때, 왕노릇한다는 말이다.

무화과 나무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말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현재적 부활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전도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도 핵심인 현재적 부활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5.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마가복음 14 3-5절『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이 그림은 나병환자 시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옥합을 깨고 예수님 머리에 붓는 여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상 왕을 상징하는 애굽의 바로에 신음하는 나병환자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하나님의 대변자 모세를 통해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가는지를 보여주신다.

모세는 여호와를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만났을 때, 지팡이가 뱀으로 되고 다시 뱀이 지팡이로 되는 것과 자신의 손이 나병에 걸렸다가 다시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지팡이가 뱀으로 되는 것은 불뱀(십자가의 죽음)이며, 뱀이 지팡이로 변하는 것은 장대에 달린 놋뱀(부활)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온전한 손이 나병에 걸린 것(십자가의 죽음)과 나병에서 온전한 손으로 되는 것(부활)을 상징한다. 그래서 상징적인 이 두사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자의 죽음(어린양의 죽음: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으로부터 출애굽시키고, 가나안(부활)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이 장엄한 이야기를 한 여인을 통해서 재조명하는 것이다. 이 여인은 상징적인 인물이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이 이야기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미리암은 헬라어로는 마리아이다. 베다니의 나사로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발에 붓는 장면과, 막달라 마리아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장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마리아를 주목한다. 그래서 미리암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미리암을 통해서 나병환자가 어떻게 온전한 사람으로 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나병은 피부병의 질환이지만,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나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격리시키고, 치료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당시 거의 이백만 수준의 인구였다. 집단생활을 하므로 이러한 질병은 공동체를 위험으로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 나병은 죄인을 나타낸다.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그런 타락한 죄인을 나타낸다.

레위기13장에서 소개되는 것은 나병에 대한 성격을 나타낸다. 나병이 어떤 질병인가 라는 것이다. 즉 죄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14장에서는 나병에 걸린 자가 정결케되는 것에 대한 규례다. 즉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레위기13 2~42절까지는 주로 오늘날의 마른 버짐이나 기계충, 피부손상과 관련이 있고, 47~59절은 곰팡이 세균과 관련된 증상이 기록되어 있다. 나병의 성격을 네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나병은 부정한 것이다. 퍼진다는 것이다. 격리되어야 할 질병이다. 불살음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할 질병이다.

13 26절에서『그러나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에 흰 털이 없으며 그 자리가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그는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만일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그가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나병의 환부임이니라』

이레(7)를 가두어 두는 것은 죽고 또 죽는 것이다(둘째 사망). 나병이 전신에 퍼지는 것은 죄가 드러난 것이다. 죄인에게 죄가 드러나는 것은 죄를 깨닫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죄가 다 사해지는 것이다.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전체가 다 퍼졌으므로 죄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은 죄의 대속을 통하여 정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 사망에 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된다. 죽고(죄에 대해서 죽고:둘째 사망) 새롭게 태어나는 것(부활)을 의미한다.

레위기 1 7절에서『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에베소서 5 2절에서『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제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제물이 하나님께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했다.

향유를 깨어 예수님께 바르는 행위는 장차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나병환자와 같이 죽어야 할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 동물은 각을 뜨고 불에 태워죽였다. 나병환자인 모든 죄인들도 이렇게 영적으로 불에 타 죽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동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가 향기이며, 향유라는 것이다. 향유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향유가 깨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향유를 깨는 것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자가 있다. 값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선행을 베푸는 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희생정신으로 받아드리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갑시다 라고 말을 할 때, 이 말에는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자비로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남을 용서하는 등 구별된 삶을 하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십자가의 죽음과 가까운 사랑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자는 취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과 하나(연합)가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마가복음 14 8-9절『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ὃ σχεν ποησεν· προλαβεν μυρσαι τ σμ μου ες τν νταφιασμν.) 한글 개역개정을 다시 번역해 보면,그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니 곧 미리 와서 장사지내는 일을 위하여 내 몸에 기름을 부었느니라』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향유를 붓는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장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도가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름붓는 일인 것이다. 즉 성도는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므로, 하나님께서 부활의 몸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기름부어지는 것이다.

마가복음 14 9절에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ποησεν ατη λαληθσεται ες μνημσυνον ατς.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이 여자가 행한 것이 그 여자(미리암)의 기념적인 일을 위해 회자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여자가 행한 것을 통해서, 모세 당시 누이 미리암의 일들이 기억나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 이 여자는 누구인가?

마가복음 143절『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귀네 γυν)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요한복음 12 1-8절에서 보면 베다니의 죽었다가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그녀의 집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내용이 소개된다.

누가복음 7 36-50절에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예수님이 식사를 하는 중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향유가 들은 옥합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죄를 지은 한 여자는 헬라어로는 하마르톨로스(죄인)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한 여자가 아니라, 죄인이라 여자라는 표현이다. 이는 일곱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가 추정된다.

마태복음 26 6-13절에서는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귀네)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장면이 나온다.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 등장하는 귀네는 상징적인 의미의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귀네(여자)는 기노마이(동사)라는 말에서 어근을 찾는다. 기노마이는 분리되다 나누어지다 라는 의미다. 창세기 2 21-23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아담)을 잠들게 하고(죽고) 갈비뼈(하와)를 내어 분리시켰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female)를 남자(male아담)에게 데려온 내용이다. 사람 아담은 남녀로 분리되기 전의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같은 단어인 남자 아담은 분리된 후의 남자(male)라는 아담이므로 사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사람(man) 아담이 첫 사람이고, 남자(male) 아담은 아담 이후에 세상에 온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여자는 그리스도와 분리된 범죄한 천사의 영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여자가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귀네는 하나님을 떠난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죽어야 할 죄인이며, 문둥병 환자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다.

둘째, 모세의 누이 미리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민수기 12 1절에서『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모세가 이방여인을 취하므로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했다. 12 8-10절에서『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헬라어:마리아)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그래서 진영 밖에 이레(7)동안 가두고 그 후에 진영으로 들어오게 했다.

출애굽기 1745-46절『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제사장은 나병환자를 진영 밖으로 격리시켰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로 인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빛을 차단시켜, 흑암의 물질 세계를 만들어, 영들을 가두었다. 격리시킨 것이다. 그곳이 바로 세상이라는 곳이다. 옷을 찢는 것은 영적으로 벌거벗은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윗입술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한다. 하나님 나라로 부터 쫒겨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혼자 살되』이 말은 육체 속에 갇힌 영을 표현한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 마다 각각의 영이 갇혀 있는 것이다.

레위기14장에서는 정결예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정결예식은 총 2번에 걸쳐서 행해졌다. 1-9절은 진 밖에서 행하는 1차 정결예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10-32절은 진 안에서 행하는 2차 정결예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4 4절『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정한 산새 두마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흐르는 물, 질그릇의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새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천국은 마치 밭에 뿌린 겨자씨와 같다』고 표현했다. 이후에 겨자씨가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자라서 많은 새가 깃든다고 말씀하셨다. 겨자씨가 천국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새는 사람(이방인)들을 의미한다.

백향목은 창세기 6 14절에서 나오는 방주다.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페르 나무가 백향목(잣나무)이다. 역청을 바르는데, 역청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한다. 그래서 백향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의 재료가 되었다.

홍색실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입고 있었던 옷이 자색옷이었고, 자색옷이 홍색실로 되어 있었다. 성막과 휘장, 제사장 옷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홍색실은 제사장을 상징한다. 출애굽기 26 1절에서『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그리고 출애굽기 28 6-8절에서 『그들이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어깨받이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이어지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 짜는 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에봇에 정교하게 붙여 짤지며』에봇은 제사장이 입던 옷이다.

우슬초는 다윗이 죄를 범했을 때, 우슬초로 죄를 정결케 해 달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우슬초는 양의 피를 바르던 붓이다. 출애굽기 12 21-22절에서『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14 5절『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흐르는 물은 살아있다는 표현이다. 율법은 생명이 없다. 그러나 율법 안에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 바로 숨겨진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이 된다. 율법은 사람을 소생케 하고 생명으로 이르게 할 선생 역할을 한다. 물은 말씀이다. 생명이 감추어져 있는 말씀이 율법이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그릇으로 토기를 말한다. 사람의 몸을 말한다.

고린도후서 4 7절에서『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질그릇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율법을 진리로 이르게 하는 분은 인자이시다. 그래서 여기 질그릇이 인자를 나타낸다. 질그릇인 인자 안에서 정한 새를 잡으라는 것이다.

14 6-7절『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두 마리의 새 중에서 나머지 한 마리는 백향목 가지에 우슬초와 함께 홍색 실로 묶었다. 그리고 거기에 죽은 새의 피를 찍어서 그 피를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서 그를 정하다고 선포하였다. 7()은 완전수이며 죽은 새의 피를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림으로써 그를 정하게 한 것은, 예수님의 피가 죄인인 성도에게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정결하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백향목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며, 그 구원은 홍색 실이 상징하는 예수님의 피로 인한 것이며, 우슬초가 제물의 피를 뿌리는 데 사용되었듯이 죄인인 성도에게 예수님의 피가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구원의 능력이 임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마리의 새 중에서 살아있는 새는 들판에 풀어주었는데 이것은 나병 환자가 나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사탄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거듭남)을 나타낸다. 두 마리의 새는 나병환자(죄인)를 위해서 죽고 사는 것이다. 결국 나병환자가 죽고 사는 것이다.

14 8절『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제사장으로부터 정하다는 판정을 받은 나병 환자는 바로 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몸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했다. 공식적으로 제사장으로부터 정하다는 판정을 받은 나병 환자는 이제 개인적으로 스스로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만 했다. 세례의식을 받는 것이다. 물에서 죽고,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의식이다. 물세례는 1차 정결예식이라면 불 세례는 2차 정결예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병 환자가 진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가족이 있는 장막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7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은 아직 2차 정결예식이 남아있었는데 그 예식을 위하여 정결한 상태로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14 9절『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제사장으로부터 정하다는 판정을 받은 나병 환자는 진 안으로 들어와서 7일 동안 자기 장막 밖에 머물다가 마지막 7일째에 자기 몸에 있는 모든 털을 밀고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야만 했다.(물세례) 그렇게 그는 2차 정결예식을 준비함으로써 2차 정결예식(불세례)을 통하여 비로소 이스라엘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그의 옛 지위를 다 회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결의식을 하게하는 이유는 육체의 질병이 다 나앗지만, 이것을 통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나병(죄악)을 낫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에서 지키도록 정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하나님을 떠난 나병환자들아 너희들은 이것을 보고 영원히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위기에서 정하고 있는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1500여년 동안 율법을 지켜왔다. 그들은 레위기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내용을 깨달았어야만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마가복음 14 9절에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미리암의 기념적인 일은 그녀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문둥병자가 되어 진영 밖에서 보내졌고,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한 여인이 옥합을 깨는 것(십자가의 죽음)과 기름붓는 모습(성령세례: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마가복음 14 8절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다.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하나님을 떠난 자(한 여인)는 예수와 함께 죽고(옥합을 깨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기름을 붓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6. 신성모독죄

마가복음 14 56-60『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증거를 찾는 중이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그들의 종교(유대교)에 위협을 가할 정도의 세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유대교를 파괴하려는 자로 여긴 것이다.

마가복음 1461-63절에서『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차례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예수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는데도, 오히려 그들은 예수의 이 말을 예수를 죽일 증거로 활용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14:62)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부활하여(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 재림(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게 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을 하는 것이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하늘의 구름이 아니라,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한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 한 후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그리스도의 재림),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가 바로 메시야였다 라고 말했다. 성령이 임했을 때,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이방나라 유대인들)이 자기의 나라 말로 방언을 하기 시작하므로 모두 놀라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이 말에 마음에 찔려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탄식을 했던 것이다.

마음에 찔린 것은 그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464-65절에서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레위기 2416절『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문제는 그들의 율법 해설서격인 미쉬나라는 책에는『하나님의 이름이라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네 글자 (YHWH) 를 입밖에 내지 않는다면 신성모독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결심을 굳히어 그 죄목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께 사형죄목을 걸 수 있는 사항은 율법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죄목밖에 없었다. 그 죄목을 걸자니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그들이 발견한 죄목은 예수의 입에서『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유도해 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예수가 메시야 라고 말하는 것의 추론이『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메시야인데, 그가 메시야라고 말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들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로마점령군과 정치적으로 음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구실로 돌을 집어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의 억지논리가 개재해 있다. 율법의 신성모독죄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을 때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메시야라고 했을 뿐인데, 그들이 신성모독죄로 걸었을 뿐이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어떤 개념인가?

그들은 로마의 정치적인 권력과 결탁하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권력의 기반을 지지해 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를 무너뜨리던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해 당시 보다 더 강력한 종교적 정치적인 권력을 지지해 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수라는 인물을 보니, 죽은 자를 일으키고, 병자를 치유하며, 귀신을 쫒아내는 등의 온갖 기적을 일으키는 신통한 자로 여기는데, 수많은 유대인들이 추종하므로, 그들은 예수를 자신의 유대교에 위협적으로 느낀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그러한 모든 권능을 성도에게 주었다고 말을 한다면, 교회의 사람들은 그런 성도들을 신성모독죄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말이 그들에게 교리에 반하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으며, 심지어 그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감추어져 있으며, 성령으로 그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그리스도의 재림) 그들의 마음 속에 성전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가 성도의 주인이 되며, 또한 성도가 하나님 나라라고 선언해주시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요한복음 14 19-20절에서『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리고 그리스도는 죄를 사해주는 권능도 주신다고 말을 한다. 요한복음 2023절에서『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일서 515-16절에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사망에 이르는 죄(성령훼방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2-13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것은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사람들에게 부활을 전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몇차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가 부활할 것이라는 말은 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신성모독이요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것을 신도는 알아야만 한다.

 

7. 십자가의 죽음

마가복음 1533-37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들의 그리스도인줄 알고 예루살렘 입성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기대에 어긋난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고 원하는 그리스도는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들의 왕이어야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자 환영이 배신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런 판국에 만약 그들의 권고를 듣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떤 화를 당하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출회하기로 이미 결의된 일이기 때문이다.  군중 심리는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여기 저기서 함성이 들려 왔다.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고 바라바를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려고 그들 손에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민심 수습책으로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빌라도는 자신의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양심을 져버렸다. 그가 예수를 고소하는 무리들에게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고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외쳐 댔다. 이 말에 그는 예수를 방면하면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을 인정하는 모함을 받은 것이 우려되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총독으로서의 현재 지위는 박탈당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한 자로서 재판을 받을 것이다. 이에 빌라도는 서둘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저희에게 넘겨주니라”고 했다.

사형수에게는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채찍질의 형벌이 있었다. 로마 군인들의 채찍은 짧은 손잡이에 몇 줄의 가죽끈을 달고 그 앞부분에 작은 납덩어리로 뾰족하게 만든 뼛조각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이 채찍으로 후려치는 날이면 등뼈가 드러나기도 하며 살점이 묻어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형수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 형틀을 젊어지고 형장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로마군인들의 잔인한 채찍이 그에게 사정없이 내려쳐진 후 이제 십자가의 형틀을 짊어지고 그 고난의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셔야 하셨다.

빌라도의 사형 언도가 확정되자 예수는 많은 무리들의 희롱을 받게 되었다. 빌라도의 관정 안으로 예수를 데리고 들어간 총독의 군병들은 마치 이성을 잃고 광적으로 날뛰는 사육제의 주인공들 같았다. 관정 안으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은 후안무치한 무리들에 의해 말할 수 없는 희롱을 당하셨다.

먼저 그들이 주님께 행한 일은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일이다. 홍포는 왕들이 입는 옷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로 더욱 그럴듯한 왕으로 분장시키기 위해 그의 손에 갈대를 들렸다. 이 갈대는 임금의 손에 들린 홀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처럼 꾸민 왕 앞에 무릎을 꿇고 희롱했다“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그리고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를 도로 빼앗아 그것으로 왕의 머리를 쳤다.

아프리카에서  시몬이라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다. 갑자기 그는 군병에게 잡혀서 십자가를 지게  것이다. 군인들은 그들이 마시는 싸구려  포도주를( 69:21)예수님께 주며『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비웃었다. 시편 69 21절에서『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그리고 군인들은 예수님의  등을 각각 제비뽑아 나누었다. 시편 22 18절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두 강도가 등장했다. 두 강도는 인류를 대표한 죄인들의 모습이다.  로마서 512절에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임을 말씀하고 있다. 두 강도의 경우는 바로 죄 값은 사망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이 두 강도가 인류의 죄를 말해준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로 의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두 길로 갈라진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두 강도에 대하여 누가 좌 우편에 서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편의상 구원받은 강도에 대하여 오른편에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멸망 받은 강도를 왼편에 있었다고 말한다. 왼편에 있는 강도는 율법의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을 보여 주신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정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편 강도는 처음에는 예수를 욕하고 비난했지만, 회개하여 구원을 맏는다. 우리도 영원히 정죄 받을 강도 같은 자들이지만, 이처럼 회개하여,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두 강도가 죄를 범한 일은 일치했다. 그리고 십자가형에 사형 언도를 받은 일도 같았다. 또 그들이 처음에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비방한 일까지도 마찬가지었다. 그러나 이 두 강도는 운명의 최후의 순간에 그들의 길이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왼편쪽 강도는 끌까지 죄인임을 회개하지 않았다. 이 강도는 예수에 대한 비방과 조롱이 죽기까지 계속되었다.“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거절하고 멸망의 길을 택했다. 이 세상에는 이 강도처럼 예수를 믿을 기회를 스스로 거절함으로 사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것이다.

오른편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자기 인생을 의뢰했다. 이 강도는 그 한편 강도와 동일 범이요 그와 함께 예수를 조롱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얼마 후에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말씀을 듣는다. 그는 좌측 강도에게 “네가 통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회개했다. 우측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있는지를 깨닫고 탕자의 비유처럼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우편 강도는“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채 달려 서 고통은 더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통 중에서도 예수님은 자기를 해롭게 한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아버지께 자비의 기도를 드리셨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놀랜 나머지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그 어두움이 걷힐 시간이 이르게 되었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주님의 고통의 외치심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있어온 이래 이처럼 애절한 고통의 외침이 있었겠는가? 이 고통의 부르짖음은 아직까지도 온 세상에 메아리쳐 올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이 주님의 고통의 외치심을 듣고 회개하고 그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다.

6시부터 제 9시까지 계속된 어두움이 가실 즈음인 그 시간에 예수님은 큰 소리를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고 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그의 아들을 버리신 것인가? 그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아들을 아들로 보신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보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신 것이다. 이로써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와 함께 심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그의 아들까지라도 버리실 수 있었던 것은 회개하여 돌아오는 자들에게 대한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사랑을 베풀지 않으신다. 오직 회개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에게만 사랑을 베푸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 삼 시였다. 이 시간은 오늘날 시간으로 오전 9시를 가리킨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후인 제 육 시(12시를 가리킴)에 이 세상에 어두움이 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두움은 세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9시에 걷히게 되었고(3시경) 그 때 주님이 운명하셨다.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향하여 무섭게 진노하셨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곧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겨냥하여 죄인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을 퍼부으셨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온 죄인의 죄를 대신 젊어진 온 인류의 죄의 대표자로서 이 진노를 당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이 같은 진노의 심판을 그 아들에게 부으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여,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자를 구원해 주신다.

예수님의 운명하심과 함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겨진 일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소 휘장이 찢겨진 일은 이제는 구약적인 희생 제물은 필요 없으시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시다. 예수님이 죽으신 직후 일어난 사건은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일만이 아니다. 마태복음 27 45-54절에서는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는 지진이 있었고 무덤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는 일도 생겼다. 무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사건은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며 그 다음에 부활하는 자로는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 부터 태어나는 자를 말한다.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된 자가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가 된다.

가슴을 치며 돌아간 무리들이 있었다. 어두움이 세 시간 동안 깔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어둠이 세상에 깔린 일은 때가 한 낮이었다. 이 어둠은 골고다 언덕뿐 아니라 모든 언덕과 계곡에까지 덮였다. 온 세상이 어두움으로 캄캄해진 것이다. 주님을 조롱하던 무리들의 입이 닫혀졌다. 제비를 뽑던 로마 군병들의 손이 내려졌다. 머리를 흔들며 주님을 모욕하던 무리들도 어리벙벙했다. 그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돌이켜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에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인 로마군병들도 철수했다. 백부장은 그 된 모든 일을 친히 보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고백하면서 끝까지 지키고 있다가 부하들과 함께 골고다에서 철수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와 다른 여자들이 끝까지 주님의 무덤 앞에 있었다.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의 시체는 십자가에 달린 채로 골고다 언덕 위에 서 계시는 것이다. 이 시체를 그대로 두고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다. 요셉이란 사람이 등장하여 주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리들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무덤을 지키는 일의 허락을 받아 무덤을 막은 돌에 인봉하고 파수꾼으로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반드시 생각되는 인물로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란 사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예수의 제자라고 했다. 그는 공회원이라고 했다. 공회원이란 이스라엘의 최고 재판 기관이요 종교적 의결 기관인 산혜드린공회의 의원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빌라도의 재판석에 서셨다. 이 기관은 이스라엘의 가장 존귀한 사람들, 대제사장,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유대인들의 당면한 중대사들을 처리하는 곳이기에 그 회원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란 존칭을 받을만 했다.

그는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결의에 가담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했다(23:50-51). 예수를 잡아 공회에서 예수님을 재판할 때 그들은 관례에 의하여 다수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만장일치의 결의를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요셉이란 사람은 분명히 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 10:32-33).

요셉은 마가복음 15 43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23:50). 바리새인들이나 공회원들은 시기가 가득한 자들이었고, 외식하는 자들이었으며, 거짓 증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재판할 때 찾은 것은 거짓 증인들이었으며, 잡다한 거짓 증거로 예수님을 정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요셉이란 사람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고 있는 공회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그들 무리들과 함께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관원들에게 잡힐 두려움으로 지금 어디 숨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요셉이 겹도 없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당당히 요구한 일은 그의 결사적인 각오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를 위해 죽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했지만 그에게 위험이 왔을 때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요셉은 평소에는 제자로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했지만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가장 어려울 때 어느 누구하나 손을 쓰는 사람이 없는 그 위기에 그가 흔연히 나타나 그의 담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그 시체가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이며, 그 증인들은 군인들과 요셉과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요세의 어머니는 알패오의 부인으로 그 이름이 마리아였다. 알패오가 난 아들중에 작은 야고보(열 두 제자중 하나)와 요세가 있었다. 예수의 형제로 일컫는 자, 야고보(열 두 제자의 일원이 아니다)와 요셉 등 네 명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이름도 마리아이고 요셉의 부인이다. 마리아 이름은 같지만 다른 인물이다. 열 두 제자중에 세배대의 아들인 요한의 형인 큰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가 있다. 큰 야고보가 열 두 제자중에 최초의 순교자다. 야고보가 세 명인데 알패오의 아들(작은 야고보)가 있고, 세베대의 아들(큰 야고보: 요한의 형)가 있고, 요셉의 아들 야고보가 있었는데, 요셉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

 

.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예수님의 행적

마가복음 16 1-6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가 살아나셨고(에게르데 γρθη)에 대해서 살펴보면, 영어번역은 He is risen(kjv), He has risen(niv)이다. 에게르데에 대한 설명이 베드로전서 318절에 있다.『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우리말은 살아난다 라고 표현되었지만, 영어는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영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까지 삼일을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하셨는가? 베드로전서 319절에서『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퓌라케 φυλακ)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퓌라케는 감옥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519절에서『주의 사자가 밤에 옥(퓌라케 φυλακ)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따라서 이 감옥은 인간의 육체를 의미한다. 영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하는데, 흙속에 있으므로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것이다.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갇혀있다는 개념이다.

삼일에서 삼(3)이라는 의미는 창세기 19-13절에서『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3)은 언약을 의미한다. 창조 셋째날은 보면 세가지가 등장한다. 풀과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낸다. 개역개정에는 풀이라고 번역되었으나, 히브리어 원어에는 에세브라고 되어있다. 에세브는 채소이다. 따라서 짐승도 풀 뿐만 아니라 채소인 에세브를 먹는다는 것이다. 짐승이 먹을 수 있는 에세브에는 제라( זֶ֔רַע  )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채소(에세 עֵ֚שֶׂב)에 대해서는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에세브는 풀과 차이가 있는 것이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며, 곧 약속을 가진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채소는 씨를 가지고 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씨는 곡식으로서 떡으로 표현된다. 가나안에서 먹는 열매는 포도주로 표현된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다. 결국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이 마지막 성찬때 등장한다. 떡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살로, 포도주는 죄를 대속하는 피(십자가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새언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씨와 열매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성취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육으로는 십자가에서 죽고, 영으로는 온 세상 사람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셨다. 요한복음 525-26절에서『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심령 속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음성을 듣는 자는 일어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떠난 것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말씀을 믿는 자가 음성을 듣는 것이다.

삼일길은 언약의 성취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로 나아가는 것이 언약의 성취이다. 출애굽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세례로 표현했다. 고린도전서 101-2절에서『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세례는 죽음을 표현한다. 세례받은 자는 세상(애굽)에 대해서 죽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삼일길을 가서 가나안 입구인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다. 가나안은 부활을 의미하며,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 앞에서 백성들은 정탐꾼을 요구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 지파에서 차출된 열두명이 사십일간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명의 정탐꾼이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모세와 벡성에게 말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밤새도록 통곡하며 울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돌게했으며, 출애굽 당시 19세 이하의 아이와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들을 이끌고 여호수아(예수)와 갈렙(이방인의 상징)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 이 말은 삼일길 후에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는데, 믿음이 부합되지 않으므로 다 죽은 것이다.

삼이라는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다른 예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다. 베드로전서 320절에서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그들은 예수님이 영으로 옥에 가서 전한 대상이다.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물에 빠져 죽어야 할 그런 존재들이라는 말이다. 노아 당시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노아는 120년 동안 회개를 외쳤다. 물론 방주를 짓는 기간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야샬의 책을 보면 방주를 5년간 지었다고 한다.

어쨌든 노아가 백성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신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주는 부활을 상징한다. 사실상 노아와 그의 가족 칠명도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의 비를 맞은 것이다. 하늘의 비를 맞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창세기 77절『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יָּ֣בֹא נֹ֗חַ וּ֠בָנָיו וְאִשְׁתֹּ֧ו וּנְשֵֽׁי־בָנָ֛יו אִתֹּ֖ו אֶל־הַתֵּבָ֑ה מִפְּנֵ֖י מֵ֥י הַמַּבּֽוּל׃

와야버(갔다) 노아 우바나오(그의 아들들) 웨이샤토(그의 아내) 웨느쉐(아내들) 바나오(아들들) 이토(그와 함께) (안으로) 하테바(방주) 미프네(관계사:때문에) (물들의) 함마불(홍수의)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노아의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홍수의 물들 때문에 방주에 들어갔다』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쏟아지므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방주로 들어간 것이다. 비가 오기 전에 방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비를 맞았다는 말이다.

비는 영적으로 하늘에서 오는 말씀이다. 율법의 비를 맞으면 홍수에 쓸려 죽는다. 그러나 복음의 비를 맞으면 부활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를 맞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상징하고,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바로 방주인 것이다. 그들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들어갔지만, 대단히 두려웠을 것이다. 육적으로 볼 때, 컴컴한 방주에 들어가면 과연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방주에 들어간 것이다.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음에도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므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범죄한 천사의 영이다. 사람의 딸들은 흙이라는 육체이다. 영과 육체가 만나므로 살아있는 생명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옥 갇혀있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감옥에서 풀어줄 열쇠를 지는 여인의 후손(메시야)을 약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좋으므로 이 언약의 약속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언약이 성취되셨다. 마가복음 1443-44절에서『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성경을 이루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반쪽 복음을 들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에 대해서, 대속을 위해 죽었음을 믿지만, 현재적 부활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에게 새성전이 세워지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심령 속으로 재림하여 들어가(파루시안:임재) 하나님 나라를 부어주신다.

이게 요엘 228-30절의 말씀이다.『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성령세례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 부활

 

1. 부활논쟁

마가복음 12 18-23절『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여기에서 사두개인들이 생각하는 부활은 육체가 죽은(네크론) 후에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을 오해했다고 말씀하신다. 1225절에서『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ταν γρ κ νεκρν ναστσιν οτε γαμοσιν οτε γαμζονται, λλ’ εσν ς γγελοι ν τος ορανος.)

여기에서 헬라어 『ταν(~때에) γρ(전치사) κ(~으로 부터) νεκρν(죽음) ναστσιν(일어나다)를 다시 번역하면,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때』라고 번역된다.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때와 한글 개역개정의 살아날 때와는 다른 의미다. 살아난다 라고 번역을 하므로 마치 죽었던 육체가 소생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죽었던 사람의 몸이 소생되면 사람으로 있는 것이지,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죽었던 자는 사람이다. 죽은 육체가 부활하였다면 부활한 몸은 사람의 몸인가 천사인가? 예수님이『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말을 하셨다. 죽었던 육체가 살아있는 육체로 부활하면 천사와 같이 되는 것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천사는 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죽은 육체가 살아난다고 믿는 자는 예수님의 하신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1226-27절에서『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말을 하신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사두개인은 육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몸은 어떤 몸인가? 신비스럽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몸이라는 것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는 알고 있다. 변신이 가능하고, 시공간을 뚫고 나타나시는 영생의 몸이다. 이러한 영화로운 몸은 부모로 부터 받은 육체로부터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활은 하늘로부터 영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부활을 죽은 육체가 부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는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죽은 후에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당시의 사두개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로마서 65절에서『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성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이 현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부활하는 것이다. 비록 육체로 인해서 볼 수는 없지만, 부활의 몸으로 태어난 자라는 것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4절에서 육의 몸이 있은즉 영의 몸도 있다고 말을 한다. 이 영의 몸이 그리스도의 옷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육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살 덩어리(육체:bod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정체성(육신:fresh)을 의미한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옛사람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옛사람은 죽어야 할 첫사람 아담의 모습, 새사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의미하는데, 마지막 사람 아담의 모습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두개인의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심을 알고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계명 중 첫째(프로테 πρτη)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프로테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계명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그리고 이어서『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은 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현재적 부활을 믿는 자는 육적 자아와 영적 자아가 분리된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정체성이 영적 자아에 있음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 자아와 싸워 이겨야 함을 깨닫는다. 육적 자아(육신)는 영적 자아(부활)의 대적인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육적 자아는 가라지에 비유되고, 영적 자아는 알곡에 비유된다. 가라지는 불세례로 태워 없애야 하는 우상인 것이다. 이 우상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 우상이 성도의 심령 속에 있다는 말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두 마음이 공존한다.

로마서 85-8절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이 두 마음이 성도의 심령 속에서 공존하고 있으며 싸우게 된다. 그래서 육적 자아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가 된다. 육적 자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나, 영적 자아는 성령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하면, 어떤 감정을 떠올리기 쉬우나, 사랑은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이웃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반드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되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성도가 이웃(영적 형제)을 사랑하는데, 상대가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사랑을 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령세례(부활)가 없다면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신도가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으면, 성경이 그들 앞에 주어진다. 그들에게 성경은 레마가 되는 것이다. 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벗어나면 성경이 호-로고스로 다가오게 되는데, 이는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는 율법 속에 있는 자신을 깨달아야만 성령의 법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2. 유월절을 지키다

마가복음 14 12-15절『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역을 앞두고 유월절 만찬을 가지는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가롯유다와 은밀한 거래를 추진하고 있었다. 1410절에서 유월절 만찬에 앞서 이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돈을 주기로 약속하고 가롯유다는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예수님은 가롯 유대의 생각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유월절 만찬 장소는 은밀하게 사전 준비된 것이다. 이는 마가복음 11장에서 나귀새끼를 타는 예수님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 밖 베다니 주변은 수차례 다니셨고, 지리도 잘 알고 그 동네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터라 나귀새끼도 쉽게 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월절 만찬장도 사전에 준비된 장소라는 것이다. 그 힌트가 물 한동이 지고 가는 여인이다. 큰 다락방은 오늘날 여관을 연상한다.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자면 물도 여러 번 길러 날랐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 둘은 은밀히 성내를 들어가 물을 깃고 지고 가는 여인과 접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약속한 대로 방의 예약을 확인하고 저녁 만찬에 필요한 유월절 어린양을 주문한 것이다. 이때는 제자들 중에 두명만 갔으므로 가롯유다는 빠져 있었고, 그래서 그 장소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알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가복음 1417-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 하나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떡을 떼면서 이것은 나의 살이라고 말하고,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나의 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영문을 몰랐을 것이다. 1427절에서는『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이 말은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8 6-10절에서『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새언약은 예레미야가 말한 것을 인용한 말씀으로『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는 동안에도 황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우상은 그들 마음에 있는 것이다. 우상은 다름 아닌 옛사람(옛성전)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우상이다. 마음에 우상을 버리지 않으면,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옛언약은 돌판(옛성전)에 새겨졌지만, 새언약은 마음판(새성전)에 새겨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921절에서『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옛성전은 율법 아래 있지만, 새성전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 한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은 장차 오실 메시야(새성전)를 바라보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출애굽하여 첫해 쓰여졌지만, 신명기는 1 3절에서 광야생활 40년에 쓰여진 것이다. 그때가 11월이었으므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약 한달 밖에 남지 않았다. 모세를 제외하고 옛사람은 광야에서 다 죽은 상태였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들에게 새성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신명기 29 1절에서『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호렙산에서 언약을 받았다. 그러나 모압 땅에서 언약의 말씀을 받았다.

신명기 30 14절에서『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으로는 유대인들이『지킬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제 새사람인 너희들은『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새성전)로 인해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죄로 인해서 날마다 희생양을 죽여야 했던 일들을 통해서, 이 동물들이 장차 오실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임을 그들은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사를 통해서, 마음 속에 세워진 성전(메시야)를 생각하며,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0 8절에서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한다.『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사도바울이 전하는 믿음의 말씀은 심령 속에 세워지는 새성전,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메시야가 헬라어로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새언약은 부활을 의미한다. 부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에 제자중 한명인 가롯유다가 개입한다. 예수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팔고, 다른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다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가버렸다. 베드로는 닭이 세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했다. 제자들의 이 모든 것은 옛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옛사람은 십자가와 함께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시고 훅 하고 불어넣어주셨다.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새언약을 체결할 사람들을 찾으신다. 새성전을 마음에 새겨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고 그곳에서 성도와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옛성전은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여 죽었음을 믿는 것이 곧 옛성전의 파괴이다. 마음에 새겨지는 새성전이 성도이며, 천국이며, 천년왕국인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새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재림인 것이다.

 

 

3. 재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이 땅에 사십일간 머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다. 그 말을 마친 후에 제자들이 보는 상황에서 승천하셨다. 그런데, 사도행전 111절에서『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엄밀히 제자들이 본 장면은 하늘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심령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과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과는 다른 사건인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따라 답은 달라진다.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알고 있다. 삼위일체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셋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인 것 헷갈리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보면 삼위일체론의 초기 기원은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확장에서 시작되었다. 막 태동되었던 기독교에게 70 유대 전쟁에서 다른 유파가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바리새파 유대교와 인성을 강조하는 에피세파, 신성의 영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 등장으로 기독교 뿌리를 흔든 자극이 되었고, 육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논리적인 설명인 신학이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즈음에 형성된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론과 그 그리스도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인 삼위일체가 등장하였다. 삼위일체는 점차 발전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는 세계관과 신학적 지침으로서 기독교에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위키백과의 내용을 빌려서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로 존재하지만, 본질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교리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후대 교회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위일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삼신론은 세 인격의 세 하나님이라는 이론이다. 양태론(modalism)은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성부·성자·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 인격의 한 하나님이라는 이론이다.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의 시대에는 성자로, 신약 이후에는 성령으로 활동한다는 주장이 양태론이다. 종속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온전히 하나인 주체이나,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양자론은 하나님이 예수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삼위일체 찬성 교파와 교단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구약성경, 신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보편교회 시대의 신학적 기준을 사도적 지침이라 여기고 수용하는 교단들이다.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 개신교회 교단들인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다.

삼위일체 반대 교단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교파로, 현재 주류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배교라 여기고, 초대교회에서 보편교회 시기를 지나며 현재 교회가 배교로 단절되었으며, 삼위일체 역시 단절의 이론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단절을 잇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 세계공의회 교리를 거부하는 회복주의 성향들로 여호와의 증인,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 유니테리언 등이다.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육체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인 것을 성도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유일신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을 믿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세분이 아니라 한분이시나, 하나님 나라의 범죄한 천사들을 세상에 가두고(인간을 포함한 천지창조), 그들을 다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구원)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인간 세상에서는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 자리로 돌아갔음에도 재림할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여긴다면 곤란한 것이다. 실례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은 그리스도와 다른 분인가?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성령 따로, 그리스도 따로, 성부 따로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분의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기는 곤란하므로 세 위격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말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있을 때는 그 이야기가 받아드려질 수 있어도 현재의 상황에서 삼위일체를 따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성도에게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물론 그것을 믿지 않는 신도(기타 사람들)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에게는 심판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물론 마지막 날에 성도가 아닌 자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주로 오신다. 이것이 백보좌 심판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신도에게는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깨달아야 한다. 재림을 가다린다고 하는 신도들은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재림을 기다리는 신도들은 여전히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들이다.

요한복음 167절에서『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은 요한복음 1615절이다.『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한계시록 227절에서『보라 내가 속히(타퀴 ταχ) 오리니(에르코마이 ρχομαι )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테론 τηρν )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타퀴(ταχ) 급하게 라는 의미다. 에르코마이(ρχομαι) 현재시제 중수디포테로서 지금 오고 있다는 말이다.  말은 예수님의 재림인가 아니면 심령 속에서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것인가? 재림이라면 세상의 종말이 되는 것이다. 종말이 아니라,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테론(τηρν) 현재시제이다. 두루마리(요한계시록)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급히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주가 되시고, 그의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지키는 것은 보존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말씀 속의 의미가 잘 보존되도록 진리에 있으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 비진리의 교회에서 진리를 보존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요한복음 142-3절에서『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이는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질 성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성도의 심령 속에 있는 성전으로 들어오시고, 성도 역시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요한일서 4 13절에서『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엔 아우토(ἐν ατ))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엔 아우토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역시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 안에 있게 된다. 성령을 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을 성도에게 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도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부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즉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육체로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인자)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성부와 성자 성령의 관계로 나타난다. 그리고 성도 역시 이 땅에 있으므로, 성부와 성자(그리스도), 성령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가 성부(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 있으면,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여호와 하나님)가 성도에게 있는 것이다.

성도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면, 성도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 마태복음 32절에서『회개하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천국은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성도의 주인이 되므로, 성도의 이름은 십사만사천이 되며, 천년왕국의 왕이 되고,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님이 종말에 재림하여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믿는데, 현재적 부활을 믿고, 현재적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자에게는 지금 바로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며, 왕노릇한다는 말이다. 사탄이 세상 왕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왕노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았으면, 당당히 진리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비진리에 갇혀있는 자를 구출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 가장 큰 계명

 

1.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

마가복음 1228절에서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프로테: 프로토스)가 무엇이니이까』

프로테(πρτη)는 순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1229-30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σχ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여기서 네가지가 등장한다. 카르디아스는 마음으로 번역되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313절에서 『너희 마음(카르디아스)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파루시아)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카르디아스는 영적 마음이다. 파루시아를 강림으로 번역했는데, 교회 사람들은 종말 때 예수님의 지상 재림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도의 심령 속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재림),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는 성전에 임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번역된 것은 새사람의 몸을 입은 영적인 마음이다.

프쉬케는 혼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혼을 의미한다. 이 혼은 죽어야 할 혼이다. 옷을 갈아입듯이 이전의 혼(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다한다는 말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라는 의미다.

디아노이아스는 에베소서 23절에서도 표현되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디아노이아스)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θελματα τς σαρκς κα τν διανοιν)으로 번역되었는데, 헬라어로 보면, 육신과 그것의 마음이 원하는 것이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육적 마음인 것이다. 육적 자아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에서 농부가 굳었던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서 열매를 얻을 수 있듯이 그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나라 발견하라는 의미다.

이스퀴오스는 능력 권세 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는다. 마태복음 1127절에서『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성도 역시 그리스도로부터 이와 같은 권세를 받는다. 권세를 받는 성도는 하나님으로 오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둘째(데우테라:데우테로스)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데우테라(δευτρα)는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가장 중심은 하나님 사랑이지만, 그 다음은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아가파오)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다.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되어 죽었음을 믿고, 함께 부활되어, 새혼을 입고, 영이 살아나므로, 성도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씨뿌리는 비유처럼 굳어있는 육적 자아를 깨어(디아노이아스) 하나님을 발견하고, 옛혼이 죽고(프쉬케인 혼을 다하고), 새옷을 입은 영의 마음으로(카르디아스:영의 마음), 심령 속의 성전이 세워져 왕 같은 제사장의 권능(이스퀴오스)을 부여받고 죽었던 영이 살아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웃(교회 신도)에게도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해주어서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 바로 아가파오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한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앞에 부활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육적 부활이 아니라, 영혼(영과 혼)의 부활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비유적으로 네가지의 단어를 이용하여 영혼의 부활과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그런데, 서기관은『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라고 말을 한 것이다. 제사장, 서기관 등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굳게 믿었는데, 예수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 분이 참 메시야 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표현을 다르게 했지만, 유대지도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서로 다르게 믿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 신도들이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다. 그러나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명의 돌판을 받으러 간 사이에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제사를 한 그런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 율법주의, 다른 종교와 비슷한 영지주의적인 생각이 바로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마음(카르디아스)을 다하고 지혜(쉬네세오스)를 다하고 힘(이스퀴오스)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12:33)

카르디아스는 영적인 마음, 쉬네세오스는 영적인 지혜, 이스퀴오스는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권능을 의미한다.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고 여러가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평상시에도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분이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 메시야이구나 라고 여겼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표현은 할 수 없었으나, 마치 니고데모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컸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34) 예수님은 한 서기관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지만 현재적으로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예수께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유대교의 출교는 죽음처럼 여겨지는 그런 시대였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오늘날 교리에 젖어있는 신도들이 교리를 벗어나면 영적으로 죽는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현재적 십자가의 죽음과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심령 속의 그리스도의 재림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된다. 율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며, 하나라도 어기면 심판을 받는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당시 한 서기관이 지혜롭게 대답하므로, 예수님이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다고 말을 했지만, 오늘날 교회의 대부분은 지혜롭게 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421절을 대하는 태도때문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이 ( ) 부분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χων τς ντολς μου κα τηρν ατς κενς στιν γαπν με·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해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는(에콘 χων) 자와 그것들을 지키는(테론 τηρν) 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첫째되는 계명은『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ας)을 다하고 목숨(프쉬케 ψυχς)을 다하고 뜻(디아노이아스 διανοας)을 다하고 힘(이스퀴오스 σχος)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계명을 가지는 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지키다 라고 번역된 테론(τηρν)은 기본형은 테레오로서 방어선을 지키다, 보호하다, 상태를 유지하다 등의 의미다. 즉 성경의 규정을 행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새겨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적용시키는데 있다. 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사랑하는 것을 규정과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규정을 지키듯이 완벽하게 지키는 자가 있는가?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규정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규정을 지켰다고 말을 한다면 무슨 근거로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완벽하게 사랑했다고 누가 인정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자는 정말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가? 여기에 답하려고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412절에서『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이 말을 확대 해석하여 장차 종말에는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환란이 올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인내로서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므로 이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있으며,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도 계명을 지키는 것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항에 대해 행동하는 것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7절에서『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테론)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여기도 마찬가지로 지키다 라는 헬라어는 테론이다. 즉 보존하다, 유지하다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다. 이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단이 생기는 것이다.

이단들은 계명을 지키는 것을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적용한다. 말하자면 율법을 지켜 행하자는 말이다. 하나님이 십계명(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하여 죄인임을 고백하고 장차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짐승을 죽이는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 이 짐승을 대체하는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율법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지도자들은 율법주의로 확대 해석하여,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리에서 예수님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학적 개념에서 학자들은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영생을 얻게할 조건으로 죄인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지불하여 그의 모든 백성의 부채를 갚음으로서 수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은 그의 능동적 순종의 일부이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종속되어 살았으며 종의 형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은 수동적 순종의 일부라는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지지하는 파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파가 있다.

율법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국가적인 법 또는 도덕법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이전에도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명령하신 규례들이 있다. 율법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를 말씀한 것으로 생명과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생명과 구원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저 도덕법이라든가,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각 나라의 일반법과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율법을 율법 속에 담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의 규정에 얽매인 율법주의로 바라본다면, 생명과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느니 마느니 말하는 자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단을 배척하면서도, 스스로 잘못된 교리를 말하거나 헬라어 성경과 다르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그게 이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부자와 낙타 이야기

마가복음 10 21-25절『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이 이야기는 부자가 예수님께 다가가 영생에 대해서 물을 때, 예수님과 부자와의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이다. 예수님은 먼저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부자는 자신이 모든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부자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떠나가니, 예수님이 낙타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표면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를 깨달아야만 한다. 우선 표면적인 이야기는 계명을 잘 지킨다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하나님 나라를 들어간다고 이해를 한다. 돈을 포함한 물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이야기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부자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예수가 선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마가복음 1017-18『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신으로 받들지만, 오직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한 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심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자는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을 한다. 교회 사람들은 죄를 짓는지 항상 계명에 비추어 자신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명을 잘 지키므로서 자신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조건은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장차 오실 여인의 후손인 메시야를 발견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동물의 희생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은 것임을 나타내며, 죄인 역시 동물이 죽을 때 함께 죽은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 특히 로마서 6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휘파게 παγε) 네게 있는(에케이스 χεις) (호사 σα)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프토코이스 πτωχος)에게 주라(10:21)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이것을 이행할 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팔아야 할 대상은 부자(교회 사람)가 가지고 있는 육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923-24절에서『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휘파게는 물러나다, 은둔하다, 떠나다 라는 의미다. 우리 말은 가서 라고 되어 있는데, 자신의 정체성에서 육적 자아를 떠나라는 것이다. 에케이스는 붙잡다, 소유하다, 보관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호사는 ~만큼 이라는 양을 나타낸다. 교회 사람으로 상징되는 부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탐욕으로 대변되는 육적 자아이다. 이 육적 자아를 팔아(제거해) 버리고 나면, 영적 자아를 얻게 된다. 이 영적 자아를 다른 사람들(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이다.

비진리에서 떠나 진리를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나누어 주라는 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진리의 말씀인데, 부인하는 대상은 육적 자아이고, 부인하는 주체는 영적인 자아인 것이다. 프토코이스는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자이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죄인됨을 깨닫는 자를 상징한다.

육적 자아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식하면 이 사람은 율법 속에 있는 자가 된다. 그러나 영적 자아에 있는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그게 바로 부활인 것이다. 육체가 죽어서 이루어지는 부활이 아니라, 현재 부활이 이루어진다. 현재 십자가에서 죽는 자가 현재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활이 바로 하늘의 보화인 것이다.『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도와 부활을 전하는 길이다.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기 위한 길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10:25) 평행구조로 보면, 부자와 하나님 나라, 낙타와 바늘귀로 연결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대조한다.

부자로 상징되는 교회 사람들이 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예수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자기가 믿는 믿음과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 있는데, 자기가 믿는 믿음은 율법 속에 갇혀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은 성령으로 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낙타는 율법을 상징한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늘귀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하며, 이를 표현한 것이 세례이다. 세례는 죽고 부활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물세례는 죄에 대해서 죄의 몸이 죽고, 불세례는 옛혼(가죽옷)을 태우고, 성령세례로 세 혼(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 부활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어야만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루어진다. 그래서 심령 속에서 천국이 다가오며,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날 교리로 볼 때 이단에 가까운 내용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부활과 예수님의 재림을 먼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이 재림하면 부활하고, 천년왕국이 세워지고, 신도들은 예수와 더불어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칠년 대환란이 있으므로, 먼저 공중재림이 이루어지고 휴거도 나타나고, 칠년 환란이 끝나면 예수님이 지상재림하여 통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칠년 환란에 대해서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중에 하나를 믿는다. 이는 마치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권능을 가지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세상을 통치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제자들 중에는 누가 크냐 라는 다툼까지 생겨났던 것과 같은 모양이다. 여전히 육의 눈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영적인 눈은 감겨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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